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시간의 향기 본문
1. 책 소개 - 밑줄 친 구절
정지 상태는 가속화 과정의 "이면"이 아니다. 정지 상태의 원인은 운동과 행위의 가속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가는지 더 이상 알 수 없다는 상황에 있다. 바로 이러한 방향의 부재가 언뜻 보기에 상반되는 듯한 현상, 즉 가속화와 정지 상태를 초래하는 것이다. ... 시간이 예전보다 빨리 흘러간다는 느낌도 뚜렷한 시간의 분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느낌은 사건이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 채, 즉 경험이 되지 못한 채 빠르게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버리는 까닭에 더욱어 강화된다(52).
자유롭다는 것은 단순히 구속되어 있지 않거나 의무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를 주는 것은 해방이나 이탈이 아니라 편입과 소속이다. 그 무엇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는 공포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자유롭다 'fri'는 '사랑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자유롭다는 것은 본래 '친구나 연인에게 속해 있는'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바로 사랑과 우정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묶여 있음으로 자유로워진다. 자유는 가장 전형적인 관계적 어휘다(62).
어떤 의미에서 이야기는 맹목적이다. 오직 한쪽 방향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에는 언제나 사각지대가 내재한다(87).
그는 이제 "결연한 시선"이 긴 것, 느린 것을 보기에는 너무 근시여서 긴 시간의 향기를 느낄 줄 모른다는 것, 과도하게 고양된 주체성이야말로 깊은 권태가 생겨나게 한 주된 원인이라는 것, 더 많은 자기 생각보다는 더 많은 세상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은 행동보다는 더 많은 머무름이 권태의 저주를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134).
깊은 권태는 과도한 활동성, 어떤 형태의 사색도 알지 못하는 활동적 삶vita activa의 이면이다. 강박적인 활동주의는 권태를 지탱해준다(135).
기계화로서의 산업화는인간의 시간을 기계의 시간에 동화시키려 한다. 산업화의 명령은 기계의 박자에 맞게 인간을 개조하라는 시간경제학적 명령이다. 노동에 의해 지배당하는 삶은 활동적 삶, 그것도 사색적 삶에서 완전히 차단된 삶이다. 사색의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인간은 일하는 동물로 전락하고 만다. 기계의 작업과정과 유사해진 인간의 삶은 오직 쉬는 시간, 일이 없는 막간, 일의 피로에서 회복하여 다시 최상의 컨디션으로 일에 몸 바치기 위해 필요한 시간밖에 알이 못한다(148).
노예는 주인의 자아를 위해 자신의 자아를 포기한다. 그리하여 주인은 노예 안에서 아무런 낯선 것도 느끼지 않게 된다. 이러한 자아의 연속성이 주인의 권력과 자유를 만들어낸다(152).
사색이란 신의 애정 어린 관심 속에 머무름으로서,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구분과 장악의 의도를 포함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비로운 합일속에서 분리선과 울타리가 완전히 해체된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경우에서처럼 오히려 활동적 삶과 사색적 삶을 매개하려는 노력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177).
하이데거에게 "숙고 또는 숙고적 사유"는 노동으로서의 계산적 사유의 반대말이 된다. "숙고의 가난은 무용한 것의 광휘 속에 빛나는 보물에 대한 약속,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부에 대한 약속이다." 숙고는 사유가 일의 도중에 멈추는 순간 시작된다. 멈춤의 순간에 비로소 사유는 "교육"에 앞서 펼쳐져 있는 공간을 가로지른다(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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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 생각
나는 근대화의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사회에 사색과 머무름의 기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진로를 고민하는 젊은이에게 머리로만 길을 찾지 말자고 이야기하면, 내 직업과 종교적 정체성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기도하라는 거죠?" 이렇게 묻는다. 결론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지만 내가 제안한 것은 바로 이 사색과 머무름의 시간이다.
자신의 내면 안에서 완전한 주체로 평안을 얻지 못한 사람은 성급히 행동주의에 빠지게 된다. 퀘이커 교도들은 누구에게나 '내면의 교사'가 있고, 그 교사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 생각도 그렇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한 예수의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대부분 (의심과 확신을 동시에 가지고) 깊은 데까지 노를 저어 가지 못하고, 자꾸 그물을 만지작거린다.
한참 불이 붙었던 고지론 논쟁은 장소에 관한 논의다. 그러나 종교가 정말 추구하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시간이다. 장소는 시간에 대한 확신을 가진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 때를 아는 것이 먼저다. 어디가 됐든지 장소를 점령하기 위한 행동에는 효율성이 주된 화두고 따라서 자기중심적인 기도 밖에 할 수 없다. 신의 애정어린 관심 속에 머무를 수 있다면 의식의 계몽을 위한 투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성취를 위한 지지로서의 기도 응답이 아니다.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반드시 사색이 필요하다. 머무름의 기술이 필요하다. 나는 머무름의 기술이 기도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모두에게 기도가 필요하다. 계산적인 사고를 멈추는 기술을 익히지 않고서는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없다. 내면의 평화 없이는 어떤 장소든 활동으로 채우게 된다. 활동으로 채운 장소에는 시간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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