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어떤 시작 본문
유대교에서는 안식일을 기독교에서는 주일을 특별한 날로 지키는 전통이 있다. 나는 시간에 리듬을 부여했다고 이해한다. 이걸 최초로 고안한 사람은 참 지혜로운 사람이다. 다양화된 세상에서 쉼으로 시작하는 단조로운 리듬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생활 방식이나 가치관이 그만큼 다양해졌다.
하지만 시간의 리듬은 여전히 유효하다. 일, 월, 년이 있다는 사실, 또 우리가 아직 그 우주의 운행과 동행하려는 시도를 당연시한다는 사실이 현실이다. 어디에 방점을 찍고, 시간의 리듬을 탈지 결정해야 한다. 나는 기독교인이 되고 싶어서 일요일에 악센트를 찍고 라임을 넣는다. 그리고 예배력을 공부한다.
그런데 인생에는 기획된 주기로는 담아낼 수 없는 다른 리듬이 있다. 들어본 적 없는, 이 낯선 리듬에 몸을 맡겨야 할 때가 있다. 인생에도 계절이 있고, 낮과 밤이 있다. 씨는 보통 봄에 뿌리지만, 인생의 씨를 뿌릴 때는 추운 겨울일 수도 있고, 계속되는 밤일 수도 있다.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가 있기 마련이다. 선택당할 때가 있는 법이다.
지난 4월 이후로 방향을 잃었다. 애써 모은 철학과 신학에 거절당한 기분이었다. 세월호 때문이다. 4월에서 5월 5월에서 6월을 지나면서 몸으로 빚지 않은 모든 언어가 집을 나갔다. 그래서 존재가 집을 잃었다. 몸이 없어서라고 생각한다. 존재는 있는데 활동이 없어서라고 생각한다. 부끄러웠다. 부끄러웠으면서도 아무 실천도 하지 못했다.
페이스북에 설교문을 올리는 무리수를 써서라도 글을 쓰고, 나누고 싶은 마음을 더는 고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쓰질 않았다. 눈치 보지 않을 수가 없어서 그랬다. 하지만. 나는 이렇다. 그 뒤로 뭐가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뭔가 써야겠다 생각한다. 세월호 추모시집인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 책머리 마지막 문단이 이렇다.
대한민국이라는 세월호에서 가족과 친구와 연인을 잃은 비통한 슬픔을 디딤돌 삼아 우리는 이렇게 다짐한다. 우리의 자존을 겁박하는 권력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생명과 일상을 위협하는 모든 부정에 회피하지 않고 맞설 것이다. 우리의 미래와 사랑을 자본에게 통째로 맡기는 것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희망을 퍼뜨리면서 절망과 싸울 것이며 사랑을 지키면서 억압을 깨뜨릴 것이다. 정의를 말하면서 협잡을 해체할 것이며 공동체를 껴안으면서 권력의 폭력을 고발할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위해서라면 피 흘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다. 이것이 문학의 윤리이며 문학이 말하는 자유임을 믿기 때문이다.
문학의 윤리, 문학이 말하는 자유가 이렇다는데, 종교의 윤리, 종교가 말하는 자유는 어떤가? 문학의 그것과 같다면 어떻게 같으며,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가? 지금 내 마음이 다른 때보다 더 비장하거나 더 진실하지는 않다. 어떤 시작은 그럴 필요가 없다. 다만, 나는 낯선 리듬을 따라가기로 한다. 나는 내 삶을 신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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