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성령강림후 제13주(C year) 실패를 무릅쓰는 사람 본문
Ten Brink, Carsten <Long Walk to the Fire, 2011> 그림 출처: http://lectionary.library.vanderbilt.edu/ |
친구가 물었다. “유토피아를 믿어? 노력하면 세상이 달라질 거로 믿어?” 짧게 대답했다. “아니.” 친구는 몇 번 더 질문했다. 정확한 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럼 왜 세상을 바꾸려는 그런 생각을 품느냐 물었던 것 같다. 나는 존엄성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장황하게 했다. 친구 얼굴을 보고 알았다. 설득되지 않았다는 것을. 하지만 정작 나는 대답하며 스스로 정리가 되었다.
소설가 백민석이 10년 만에 「혀끝의 남자」를 내면서 인터뷰한 내용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만 같다. 기자가 “독자들이 관심 있게 읽어줬으면 하는 부분은?” 무엇인지 물었다. 그가 답했다. “이 세상에 신이 없다는 거는 아주 약간의 지적 능력만 있으면 금방 깨달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근데 문제는 뭐냐면, 그걸 누구나 다 알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이 계속 신을 믿고, 신에 의지하고, 신을 계속 만들어 내는가는 아주 약간의 지적 능력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거 같아요. 왜 사람들이 계속 신을 만들고, 자기네들이 만든 신을 의지하고, 그것 때문에 죽는가?” 그의 대답에 기자가 다시 “사람들이 신을 믿는 것에 대한 본인의 생각은?” 하고 물었다. 그러자 “사람이 너무 엉터리라서! 신은 사람이 만들었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거는 신인 거 같아요. 신이 없이는 우리는 너무 엉터리인 거 같아요.” 이 마지막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기독교인이라서, 목회자여서, 그런 게 아니다. 유신론이니 무신론이니 그런 이야기에는 나는 별로 관심이 없고, 다만 내가 믿는 신은 나를 인간답게 만들고 있는가, 내게는 이 물음이 중요하다.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이 내 나름의 신을 위한 변론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평생 부모로 알고 지낸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느 날 우리는 친부모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면, 세상이 무너질까? 그럴 사람도 있겠지만, 어쩐지 나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덤덤하게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친부모로 믿고, 아니 믿고 말고 할 게 없이 맺은 이제까지의 그 순수한 부모·자식의 관계는 친부모가 따로 있다고 해도 여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인간답다는 것은 이런 것에 가깝다. 오히려 문제인 것은 엄연히 친부 친모인데도 자식이 친부모임을 믿지 못할 만큼 그 관계가 버성긴데도 그 관계를 평생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유토피아 곧, 예수와 예수가 말한 세상(하나님 나라)과 맺는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오늘 신약 본문인 히브리서에는 믿음의 사람을 손꼽아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히 11: 39). 무슨 말인가? 믿음으로 예수를 따른 사람 가운데 유토피아에 도달한 사람이 없다는 말이며,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를 손으로 만지고 발로 밟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아, 기독교는 희망 고문인가?
아무리 애를 써도 도달하지 못할 곳을 두고, 어차피 헛수고니 아예 잊고 살자 말할 수도 있고 그와는 다르게 도달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바랄 수 있어서 끝내 아름답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게 끝내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러나 끝끝내 바랄만한 것을 기독교에서 발견한 사람이 기독교인이 된다고 믿는다. 역시 문제는 믿지 못할 만하다고 믿는 것이며,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믿으면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척해야 하는 믿음이야말로 애처로운 것이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은 확실히 있다’ 식의 공포마케팅 전도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공포는 믿음과 가장 먼 곳에 있어야 할 감정이다.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그렇게나 많이 나오는데도 공포 마케팅으로 천국에 입장시키려는 것은 인간답지 않은 방식으로 기독교에 발을 들여놓게 하는 방법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은 「키아바의 미소」이다. 낚시를 못 하는 키아바가 어느 날 큼지막한 물고기를 낚는다. 근데 기쁨도 잠깐, 이 물고기가 씩하고 키아바를 보고 웃는다. 키아바는 갈등하다가 ‘웃는 물고기는 차마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물고기를 놔준다. 돌아온 아빠는 낚시에 실패한 키아바를 놀린다.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곰과 마주친다. 마침 총이 없던 아빠는 어떻게든 곰을 쫓아보려고 사납게 울부짖는다. 하지만 그럴수록 곰은 더 난폭해진다. 이때 키아바가 곰 앞에 가서는 씩하고 웃는다. ‘이게 뭐지…….’ 하고 처음 보는 광경에 곰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간다. 아빠는 마을에 돌아와 사람들을 불러 놓고 신이 나서 말한다. “우리 아들은 훌륭한 낚시꾼은 아니지만 훌륭한 마법사에요.” 얼마 후 멀리 사냥 나갔던 마을 사람들이 돌아왔다. 큰 폭풍이 온다는 나쁜 소식을 마을에 전한다. 마을은 이내 어수선해진다. 곧바로 폭풍을 대비해 집을 튼튼히 하는 준비를 한다. 잠자리에 들었던 키아바는 뭔가 결심한 듯 집을 나서고, 절벽 앞에 서서 이제 곧 마을을 삼킬 큰바람과 마주한다. 그리고 있는 힘껏 씩하고 웃는다. 어이가 없는 바람은 호통을 친다. “그까짓 걸로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때 키아바가 대답한다. “안 된다는 건 나도 알아요. 그래도 해 볼 수는 있잖아요.” 큰바람은 하도 기가 막혀 껄껄껄 웃다가 길을 잃고 사라진다. 마을을 지킨 키아바는 집으로 돌아간다.
기독교의 이상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다는 말은 기독교의 신앙을 이해하면 할수록, 또 신앙을 가지고 어떤 몸이 되어야 하는지 해답과 전략이 마련되면 될수록 오히려 현실로부터 소외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독교의 이상에 가까워지면서 그렇게 다른 세상의 사람이 되어 벗어날 수 없는 실패의 자의식에 시달린 것은 우리가 아니라 먼저 예수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 50).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말에 의식을 지배당한 세상이 있었고, 그래서 그 세상을 미워한 사람은 되면 한다는 말로 저 세상을 조롱하여 새로운 세상을 확보 한다.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은 안 되는 것을 알며 하는 사람의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다른 세상의 사람을 실패를 무릅쓰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정말 해버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지만, 내가 더 사랑하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실패를 무릅쓰는 사람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 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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