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부할절 제7주 | 하나 됨 (한정훈) 본문
주보
부활절 제7
시편 68: 1-10, 32-35
1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
2 연기가 불려 가듯이 그들을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3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4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
5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6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7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서 행진하셨을 때에 (셀라)
8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 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
9 하나님이여 주께서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기업이 곤핍할 때에 주께서 그것을 견고하게 하셨고
10 주의 회중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32 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 (셀라)
33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34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의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의 능력이 구름 속에 있도다
35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사도행전 1: 6-14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베드로전서 4: 12-14, 5: 6-11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11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요한복음 17: 1-11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7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9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 됨
오늘은 부활절 제7주, 마지막 부활절이다. 부활의 마지막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부활의 증인으로 초청받은 은혜의 감격을 함께 누리길 기도한다.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가 엠마오로 가는 길에 만난 예수를 다시 기억해 보자. 예수에게 모든 기대를 걸었던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 이후 뿔뿔이 흩어졌다. 글로바 일행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희망을 거절당한 두 사람은 예수가 없던 일상으로 힘없이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예수는 가만히 길동무가 돼 주셨다. 그리고 오랜 대화를 주고받은 끝에 떡을 떼는 예수를 보고, 친밀하면서도 낯선 이 사람이 예수임을 알아보았다. 저녁이 다 돼서야 눈을 떴다. 곧바로 예수는 눈앞에서 멀어졌지만, 어느 때보다도 또렷이 예수를 보았다. 다른 사람이 됐다. 두 제자는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다.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 32) 희망이 사라진 마음에는 온기가 없다. 냉랭한 절망의 심장을 뜨겁게 하는 것은 말씀뿐이다.
예수가 하늘로 올려지기 전 사도들이 질문한다. “이스라엘에 나라가 회복될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행 1: 6) 어떤 세상을 이스라엘에 나라가 회복될 때로 보는지, 성경은 구약부터 신약까지 다양한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 넣어도 물지 않는 날로 그리기도 했고,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세상으로 그리기도 했다. 어쨌든 오늘 부활절 제7주는 이스라엘에 나라가 회복될 때를 시편 68편에 기대어 생각하자. 시편 68편은 마침내 정의가 바로 서게 된 날의 풍경을 그 날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우리도 예수의 대답을 기다리며 숨죽였을 사도들과 함께 예수의 입에 시선을 모으고 숨을 죽인다. 왜냐하면, 시간을 훌쩍 건너뛴 우리도 같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땅에 정의를 회복하실 때가 지금입니까? 지금이 정말 그렇게 하셔야 할 때가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의 대답은 차갑다. “너희가 알 바 아니다.”(7)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 있다고 대답한다.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언제 이 땅에 정의가 서게 될지 궁금하다. 세월의 침몰로 드러난 감당할 수 없는 부조리를 보면서 과연 역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지, 하나님이 선한 의지를 가지고 계시는지, 우리가 마침내 그 날을 볼 수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사 날을 받는 사람의 심리는 어떤 것일까? 사람은 손에 잡히는 확신을 원한다. 분명하지 않은 것은 참기 어렵다. 그러나 예수는 잘라 말한다. 손에 잡힐 확신은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거절이다. 대신 예수는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 내 증인 되리라.”고 말한다(8). 이 마지막 말을 마치고, 하늘로 올려 가셨다. 또다시 이별이다. 어디에도 예수는 없다. 예수의 빈자리를 확인하며, 사도들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또 한 번 허탈함과 절망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러나 성경은 이들이 달라졌음을 증언한다.
두 번째 이별을 겪으면서는 예수가 없는 일상으로 돌아가던 절망의 발걸음을 물리치고,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14). 기도에 힘썼다는 말은 나약해졌다는 말도 아니고, 교회에 모여 열광적으로 기도했다는 말도 아니다. 그 이상이다. 기도에 힘을 쏟는 사람은 절망의 사람이 아니라 희망에 이끌리는 사람, 희망의 사람이다.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을 잠시 생각해 본다. 하늘로 올려 갔다는 말은 예수가 공중으로 떠올라 우주 어딘가로 날아갔다는 말이 아니다. 십자가의 예수가 죽어 음부로 내려갔다는 것과 반대되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
베드로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말한다(벧전 4: 14). 영광의 영이 우리 위에 계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 아래 있다는 말과 같다. 예수가 하늘로 올려 가셨다는 말은 부활한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이 예수 아래에 있다는 말로 읽어야 한다. 완전한 고립 상태를 이르는 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을 쓴다.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라는 말이다. 이때 열린 곳은 오로지 하늘이다. 하늘로 올려진 예수는 사방이 막힌 우리에게 유일한 소망이다.
베드로 사도는 “근신하라 깨어라”라고 요청한다(벧전 5: 8).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예수의 죽음은 완전한 절망과 거절이지만, 부활한 예수를 만난 사람에게 예수의 승천은 희망과 긍정의 요청이다. 예수를 역사의 전환점, 하나님의 때로 믿었던 사람은 예수와의 첫 이별(죽음) 앞에 완전히 무너졌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다시 찾아온 두 번째 이별(승천)에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근신하고, 깨었다. 그리스도인과 신을 믿는 많은 사람이 도래할 날을 기대한다. 그리고 그 날이 구체적으로 언제인지, 아니 정확히 말해 그때가 지금이 아닌지 늘 궁금해한다. 하지만 예수는 외부에서 침투해 올 그 날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딛고 선 확신을 약속한다.
이 존재의 변화 즉, 성령 받는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묻는 것이 마지막 부활절에 우리가 함께하는 이유이다. 부활절의 마지막 메시지는 ‘하나 됨’이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 11) 이것은 십자가를 지긴 전 예수의 마지막 기도이다. 하나가 되는 것은 억지로 둘을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그런 물리적 결속은 ‘하나님과 예수’의 하나 됨이 아니다. 두 당을 한 당으로 만든다고, 국민을 위한 몸과 정신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안다.
사도행전은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앞에 ‘마음을 같이하여’라는 말을 썼다(행 1: 14). 흩어지고, 갈라져 낱낱이 따로인 마음이 한마음, 한 뜻이 되는 것이 부활절이 가리키는 ‘하나 됨’이다. 이사 날을 받기 원하는 세상은 분명한 구분을 추구한다. 경상도 전라도, 대졸 고졸, 남자 여자, 백인 유색인 이런 구분부터 연봉 얼마 이상, 잘 생긴 사람 못생긴 사람, 좌파 우파,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분명한 계급, 분명한 서열, 분명한 구분을 사회적 합의로 이끌어 낸다. 이것이 세상이다. 운이 좋아 형편이 좀 낫고, 대우가 좋은 사람은 갑이 되고, 위너가 된다. 따지고 보면, 함께 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도 세상은 끊임없이 구분한다.
그리스도인은 모이기를 힘쓰는 사람이다(행 2: 46; 히 10: 25). 마음은 따로인데, 몸만 모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다. 부활절의 ‘하나 됨’은 몸은 달라도 마음이 오롯이 하나 되는 것을 뜻한다. 버성긴 것을 한 올 지게 하는 사람이 부활의 증인이요,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예수가 ‘하나 됨’을 기도하기 시작한 때를 요한복음은 이렇게 설명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요 17: 1) ‘이 말씀’이 무엇인가? 요한복음 16: 33절을 보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런 말씀이 있다. ‘하나 됨’을 기도하는 사람은 ‘세상을 이긴 사람이다’ 세상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이다.
부활절의 ‘하나 됨’은 생명의 메시지, 하늘의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늘 뜻에 끊임없이 자신을 조율하는 사람이다. 회개는 조율과 같다. 악기는 언제 태어날까? 어떤 악기든 본디 음이 있고, 그 본디 음에 최초로 조율될 때, 바로 그때 태어난다. 겉모양이 만들어졌다고, 태어났다고, 산다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이 최초의 조율을 중생 곧, 거듭남으로 믿는 사람이다. 또 모든 악기는 살면서 음이 틀어진다. 최초의 조율로 본디 음을 끝까지 지켜내는 악기는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늘 뜻에 끊임없이 자신을 조율한다. 잘 조율된 악기는 갈라진 마음을 다독이기도 하고, 상처를 치유하기도 한다.
조율을 우리말로 다스름이라 한다.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다스름된 세상이 이스라엘에 나라가 회복될 때이다. 그리스도인이 기다리는 그 날이다. 두 번째 이별인 승천은 첫 이별 즉, 예수의 죽음과는 다른 이별이다. 첫 이별이 절망이 된 까닭은 모든 것을 예수에게 의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책임지려는 사람에 의해 생명력을 얻는다. 존재의 변화와 준비가 없으면, 도래할 세상은 영원한 내일이다. 세상의 길 중에는 편의를 위해 만든 일방통행이 있지만, 생명의 길, 정의의 길, 평화의 길에는 일방통행이란 없다. 길이 되려는 사람의 자취가 길이 된다.
다만 이것은 은혜이다. 희생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지만, 의무가 된 종교는 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길이 되는 것은 복이어야지 규율이어서는 안 된다. 종교가 할 일은 모든 사람을 길이 될 값진 존재로 여기고, 사랑하는 일이다. 사랑으로 해석된 존재만이 자발적인 희생의 길을 선택한다. 하나 되는 일에 부름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세상을 이긴 사람의 기도가 이미 시작되었다. 부활절 마지막 메시지는 그 하나 됨의 기도의 응답이 우리라는 진실이다.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면, 언제고 단번에 무너질 것 같은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가슴을 펴자. 하나님은 우리를 믿으신다. 끝내 우리를 부활의 증인으로, 갈라지고 찢긴 세상을 하나 되게 하는 기도의 응답으로 세우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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