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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나는 과연 그렇구나 생각하며, 뒷모습에는 아무래도 '떠나간다'는 인상이 늘 따라붙겠지 하고 납득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나는 사람의 뒷모습에 끌리게 되었다. 누군가를 떠올릴 때 반드시 그 사람의 뒷모습을 마음속에 되살리는 것부터 시작한다. 미야모토 테루 「생의 실루엣」 '형' 중에서 '첫 장부터? 이건 뭐 나 읽으라고 쓴 글이잖아...'라고 멋대로 생각해본다. 남의 뒷모습뿐만 아니라 내 모습도 앞보다는 뒤가 더 나았으면 좋겠는데, 스스로는 볼 수가 없으니.

나는 아무도 아프게 하지 않았고,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나는 참으로 멋지게 그리고 보기 좋게 옆으로 비껴나 있었다. 로베르트 발저 「산책자」 모두에게 멍청이라 불리는 칭찬도 미움도 받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세계는 좋은 의도를 무참하게 짓밟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심지어 의도가 선할수록 부작용은 크다. 그러므로 현대 예술에서 의도 자체를 폐기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정지돈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다 연결되는 느낌. 이제 나만 연결 되면...

남 앞에서 말을 하는 직업을 가진 지 10년이 넘었다. 10년 하니까 말이 많이 늘었다. 늘지 않으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겠지만, 10년 정도 하니까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말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걸 안 다음부터 제법 조리 있게 말하게 되었다. 조리 있게 말하는 된 것은 말하는 직업의 장점이 아니다. 15분이든 1시간이든 반드시 말을 해야 하는 조건 때문에 생긴 결과에 가깝고, 말하는 직업의 장점은 따로 있다. 말하는 직업의 가장 장점은 말하는 사람이 공부가 된다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처럼 배우는 방법도 따로 있을 텐데, 남에게 말하기 때문에 더 잘 배울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말하는 직업의 가장 큰 장점이면서 거의 유일한 장점이다. 별로 장점이 없는데, 장점이 너무 ..

"인간에게서 더 적은 것을 요구했더라면, 이것이 더 사랑에 가까웠을 것인데, 인간의 짐이 더 가벼웠을 테니까 말이다. 인간은 약하고 비열하다."(539-400)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알렉세이의 형, 카라마조프의 둘째 이반의 서사시에 나오는 문장으로 대심문관이 자신의 죄수를 앞에 두고 하는 말이다. 대심문관은 예수가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을 때, 돌을 빵으로 만드는 것을 거부한 것이 결국에는 사람들을 절망에 빠트리고 말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예수가 기적을 거부하며 원한 것은 자유로운 믿음과 사랑 이렇게 고귀한 것일 테지만, 그 고귀함에 도달할 수 없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선택이 재앙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나머지들은? 나머지 약한 인간들, 강력한 자들이 참아 낸 것을 참아 낼 수 없..

"진정으로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모든 사람들, 모든 것에 대해 죄인이라는 걸 꼭 알아두세요. 이걸 어머니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그렇다는 걸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끼고 있어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조시마 장로의 형이었던 청년의 말 중에서 읽고 쓰는데 재미를 붙이고 나서 얻게 된 가장 큰 선물은 사고하는 방식과 글 쓰는 방식이 연동된다는 것이다. 생각을 글 쓰는 형식으로 하게 된다는 말인데, 의도한 바가 아니라 낯설었지만, 지금은 많이 적응이 됐다. 생각이 다 글이 되지는 않는다. 치워버려야 할 쓰레기 같은 생각도 많고, 단어와 문장이 만들어진다고 다 나눌 만한 생각일 수는 없다. 생각하는 자체를 글쓰기를 염두에 두니까 생각한 다음에는 써야 하는데, 그걸 잘 못해서 ..
아이 넷 키우다 보니 책 읽을 시간이 없다. 언제 책을 좋아하기는 했나 싶을 정도로 책을 봐도 요사이는 무신경하다. 그래도 엔도 슈사쿠가 워낙 좋아하는 작가이고, 또 책 뒷면에 "인간의 가장 비루하고 약한, 어떻게도 해볼 수 없는 부분을 통해 신은 말을 걸어옵니다." 이렇게 쓰여 있으면 읽을 수밖에는 없다. 다행히 기차 타고 전철을 오래 탈 일이 있어서 집중해서 길게 읽을 수가 있었는데, 이 글을 지금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시의적절한 큰 행운이고 격려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고 있다. 몇 문장을 소개한다. "인간 내면에는 서로 모순되는 여러 요소가 존재합니다. 그런 인간의 어떤 부분적인 것에만 솔로 악기를 울리는 듯한, 인간의 일부분에만 반응하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지 않을까요? ... 인간 심리의 ..
가난한 사람들은 까다로운 법이죠. 선천적으로 그래요. 이미 옛날부터 느끼고 있던 일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까다로워요. 가난한 사람은 보통 사람과 다른 눈으로 세상을 쳐다보고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곁눈질로 쳐다봅니다. 주변을 항상 잔뜩 주눅이 든 눈으로 살피면서 주위 사람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씁니다. 그들 말대로라면 가난한 사람에게는 성스러운 것도 있어서는 안 되고 자존심이니 뭐니 하는 것도 절대로,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얼마 전 예멜랴가 그러더군요. 사람들이 그를 무슨 자선 단체엔가 등록시켰는데 거기서 나오는 돈 한 푼 한 푼에 대해서 예멜랴가 어떻게 쓰는지 공식적인 검열 같은 것을 하더래요. 그들은 자기가 돈을 거저 주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가난..
그가 말하는 내용과 실제로 그가 사는 모습 사이에는 간극이 있었고, 저는 때로 그 모습에 약한 화가 났습니다. 그와 함께 여행할 때였습니다. 그는 영적인 삶에 대해 아주 훌륭한 강의를 마친 다음 무대에서 내려와 피로로 인해 갑자기 쓰러지거나, 혼란스러워하며 짜증을 냈습니다. 저는 받아들이기가 아주 힘들었습니다. 결국은 헨리가 자신이 강력하게 말한 그대로 살 수 있으리라는 저의 기대가 상당히 불공평하고 비현실적임을 깨달았습니다. 한번은 제가 복음에 대한 강의를 준비하고 있을 때, 그리 살지 못하는 무언가에 대해 설교하는 어려움에 대해 헨리에게 토로한 적이 있었습니다. 헨리는 사막교부들이 했던 대로, "내 말에 내가 회심할 수 있도록 설교를 계속하라"고 격려해주었습니다. 헨리가 삶의 매 순간을 그가 설교한 ..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영적 거듭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충분한 설명은 불가능하다. 거듭남이란 인간의 지적, 정서적 이해를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영적 거듭남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성령 안에서 거듭난 자들에게는 일편단심이라는 특징이 나타난다. 그들의 열망은 하나뿐이다.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대로 '진리를 좇는' 것, '빛으로 오는' 것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다(요 3: 21).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온전히 사로잡혀 있어서, 나머지 모든 것은 그 사랑의 문맥 안에서만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의 질문은 하나뿐이다. "어떻게 하면 성령을 기쁘시게 할 수 ..
나만 아는 경주를 완주했다. 누구나 힘든 과정이겠지만, 이윤기 선생님 말씀처럼 "내가 건너는 강의 여울목은 물살이 어찌 이리도 험한가?" 내 심정도 다르지 않다. 빠른 물살에 많은 걸 잃었다. 자기연민에 녹아든 수치와 분노를 앞으로 어떻게 씻어낼지. 두껍게 쌓인 패배의식을 어떻게 걷어낼지. 무엇보다 길들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나를 지켜냈는지 자신은 없다. 그렇다고 잃기만 한 것은 아니다. 늘 하고 싶던 걸 원 없이 했고, 늘 받고 싶던 걸 값없이 받기도 했다. 뭘 잘하는지 뭘 못하는지 좀 더 알게 됐고, 무얼 잡고 무얼 버려야 할지 좀 더 깨닫게 됐다. 첫 애를 가졌을 때, 여러 사람이 저 자신의 버전으로 이제 좋은 시절은 끝났다고 말했다. 인제 와서 보니 하나 틀린 말이 없다. 다 맞는 말이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