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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1. 언젠가 좋은 시(詩)는 낱말이 시인에게 말을 걸었을 때 태어난다는 말을 들었다. 옳은 말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삶은 시간이 나에게 말을 걸었을 때 태어난다고 믿는다. 시간은 대상을 갈구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줄 사람을 찾고 있다. 자주 들을 수는 없지만 한 번 시간의 말을 들으면 존재를 가득 채우는 의미가 피어난다.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라는데 우리는 피어나지 않고 시들어 버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그런데 한 시인이 단어가 건네는 말을 듣는 일이 일평생 몇 번이나 되겠는가. 야생 동물은 인기척을 느끼면 숨는 법이다. 그래서 진정한 깨달음은 방심(放心)할 때 가능하다고 했나보다. 지향과 방심이 애써 균형을 유지한 그 순간에 은총이 더해졌을 때 의미가 피어난다. 그래서 나는 운명을 믿는다. 의미가 피..
1. 성탄절 새벽 극장을 찾았다. 광주로 내려가기 전에 꼭 보고 싶었다. 또 페이스북을 통해 좋은 작품이라는 평을 자주 들어서 기대가 컸다. 실제로 노래와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메시지 모두 울림이 컸다. 다만 긴 작품을 영화 한 편에 담아내야 했기 때문인지 가끔 빠른 걸음으로 진행되는 게 아쉬웠다. 그리고 중간 중간 지루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좋은 작품이다. 보길 잘 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아내가 일어나지 못한 채 얼굴을 감싸고 울어 서다. 눈물을 훔치며 나가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지만 아내는 유독 서럽게 울었다. 결국 사람들이 다 나가고 끝맺음자막이 거의 마칠 때쯤 마지막으로 영화관을 나섰다. 집에 가면서 아내가 말했다. “회개했어. 나 너무 모르고 살았어. 여러 사람 모습이 ..
12월 첫 주에는 그 다음 주에는 에서 예배드렸고, 이번 주일에는 경기도 양평 봉성리에 있는 를 찾았습니다. 산을 깎지 않고 지으셨다는 예배당이 너무 아담합니다. 전통문화와 예배를 오랫동안 연구하셨다는 목사님과 식사하면서 나눈 대화가 너무 귀합니다. 성경에 가락을 넣어 읽으라고 몇 번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서일과를 통해 말씀이 중심이 되는 예배준비의 필요성을 설명해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예배 순서 하나 하나를 정성스럽게 인도하시던 모습이 기억에 남네요. 게다가 모든 교회 분들이 저희를 귀한 손님처럼 대접해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원래 알던 교회가 아니라 한국기독교연구에서 만든 이라는 책에서 성실교회 목사님 글에 큰 울림을 받아 용기내 교회 문을 두드렸습니다. 찾아 뵙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세월은 절망에 취해 비틀거리는데 나는 언죽번죽 우정에 감격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자비로 이끄는 하나님의 마음이 내 정황에 머문다. 거절할 수도 그렇다고 허 겁지겁 먹기도 그런 복잡한 마음이 비좁은 내 마음 그릇에 수북이 담겼다. 대가 없는 우정 없이 살 수도 없고, 어그러진 세상 향한 분노 없이도 살 수 없다. 햇살과 그림자는 봄과 겨울이 맞닿아 있는 것처럼 친구지 적이 아니다. 세상에 단색은 없다. 빨간색이라 하기에는 어쩐지 누런, 파란색 이라 하기에는 어쩐지 거뭇한 분명하지 않은 것 투성이다. 수없이 답을 물어봐도 마침내 손에 잡히는 건 더 큰 물음이다. 다만 내 눈이 역겨운 세상을 희망으로 보아낼 영이 있는지, 다만 내 품이 정겨운 우정을 자기 부정으로 바꿔낼 의지가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을 뿐이다..
1. 뻗다 마디 짓고 생각에 잠겨도 끝내 그리 살자 다시 뻗는 대나무 배봉환 시인의 중에서 바른 신념을 이야기할 때, 회의가 반드시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에 가득한 사람은 믿음직스럽지 않다. 그래서인지 나는 뜻을 정했어도 이따금 멈칫할 때가 있다. 이 길이 맞는지, 내가 세운 구상이 옳은지 의심될 때가 있다. 그래도 시작할 때 그 마음과 고빗사위에 나를 붙든 한 말씀 기억하며 ‘끝내 그리 살자!’ 다짐한다. 2. 나는 한동안 신앙생활을 러닝머신 타는 것으로 이해했다. 멈추지 않고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멈추면 뒤로 밀려나 러닝머신에서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뻗다 마디 짓고 생각에 잠긴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회의가 들면 얼른 확신으로 이겨내고, 원망이 되면 얼른 감사..
1.많이 힘든 사람들에게 기도 부탁을 받을 때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정말 안타깝다. 무엇보다 실제로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힘들다. 이리저리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땅한 격려의 말이 뭔지도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안타깝다. 곁에 있으면 입을 다물고, 손이라도 어깨라도 가만히 잡아주면 좋으련만... 산책길을 혼자 걸으며 자비를 베풀어주시길 기도한다. 상황을, 원인과 결과를 따지느라 전전긍긍하지 않고, 다만 도와주시기를. 기도한다. 의식의 성장도 확고한 신앙도 약하여 부서질 듯한 그 삶의 터를 지지해주는 한 말씀보다 중요하지 않다. 울더라도 말라버리지 않고, 넘어져도 아예 주저앉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2.너무 많은 사람들이(나 역시도) 아파하는 사람들을 너무 쉽게 이해하고, 너무 쉽게 선언적인..
자기소개서를 쓸 일이 있어서 어제오늘 정신을 집중해서 글 쓰는데 매달렸다. 그런데, 방금 A4 4장이나 쓴 글을 전부 지웠다. 제법 잘 써서 아깝고, 다시 써야 된다고 생각하니 아득하지만 어쩔 수 없다. 덧칠을 많이 해서 무거운 글이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쓰지 않았다. 가끔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할 때도 이런 실수를 가장한 욕망에 사로잡힌다. 과장을 자주 한다. 목적을 위해 정직을 소외시킬 때가 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나한테 딱 달라붙지 않는 어색한- 단어를 쓰고, 꾸미지 않아도 될 부분을 억지로 꾸미고, 사실이 아닌 걸 그럴싸하게 사실처럼 포장할 때가 있다. 아니. 솔직히 자주다. 욕구 불만 때문일 수도 있지만 허영심이 많은 천성 때문이다. 에잇. 다시 쓰자! 마음도 고..
마지막 부분. 지하사람이 리자에게 예고 없이 뛰쳐나온 정직한 자신을 몰아치듯 쏟아내는 장면을 읽을 때 울컥했다. 지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서너 차례 우울증 비슷한 걸 겪는다던데 그때 경험을 우울증을 앓았다고 표현하기에는 왠지 마뜩찮다. 우울증이라는 단어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부분, 우울증이라는 룸미러로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를 에서 볼 수 있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 걸 오래 기다리다보면 마음에 병이 난다. 이상과 현실. 이성 그리고 모순과 광기. 자기연민, 허무주의 등 지난 시절을 회상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러 있지만 날씨도 흐린데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하게 될까봐 참기로 하고. 임재범의 을 특히 좋아하게 된 시기가 바로 이때다. 이렇게 시작한다. 누구나 한..
를 읽고, 큰 감명을 받고 두 번째 빅토르 프랑클을 읽었다. 모니터에 '보란 듯이는 진리가 아니다' '단번에 되는 것은 없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를 써두고 가끔 읽는다. 실존주의 철학은 이런 거다 저런 거다 개념을 설명하기에는 실력이 부족하지만, 내가 오늘을 살고자 써두었던 이 문구들이 내가 이해하는 실존주의 (철학)이다. 의미에 목말라 장밋빛 내일로 순간이동하고 싶은 나를 오늘에 붙잡아 둔 문장들이다. 하루를 다 살아야 내일을 사는 법인데 결혼하기 전에는 그걸 머리로만 알았다. 시계가 아니라 애들이 다 자야 하루를 마치는 아내를 보고 많이 배운다. 이런저런 고상한 통찰들을 가지고 아무리 씨름해도 하루를 책임감으로 여닫는 엄마를 뒤에 둔 나는 약한 사람(아빠)이다. 내 삶의 목표는 행복이 아니..
재능이 없어도, 통장 잔액이 없어도, 장밋빛 미래를 점칠 어떤 합리적인 근거가 없어도 내가 세상을 또 내 미래를 낙관하는 까닭은 신을 믿기 때문이다. 내가 믿는 신은 전지전능한 능력자가 아니라 자비를 위해 전능을 포기하는 침묵의 신이다. 모순투성이인 삶에 미래가 있는 까닭은 마르지 않는 이 믿음 때문이다. 그때그때 허물을 바로잡고, 오롯이 성장을 위해 비전을 제시하고, 떨어지지 않게 연료를 공급하는 신을 믿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자기계발이며 경영이다. 생각해보면 많은 걸 오해했다. 알맞은 때 읽은 좋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