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쩔쩔매는 사람의 위로 본문
나는 삶을 이해하는 몇 가지 상징을 가지고 있다. 그중의 하나는 손이 닿지 않는 전등 스위치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할머니 댁에서 컸다. 할머니 댁은, 지금은 옛 동네의 모습을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은평구에 있는 기자촌인데, 유치원 졸업하는 날 부모님이 사시는 삼양동으로 이사를 왔다. 삼양동으로 이사를 와서 주말마다 기자촌에 갔다. 아무 버스나 타고 길음역에 내려서 154번 버스로 갈아타고, 종점까지 가고, 내려서 오르막길을 20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할머니 댁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내내 그 일을 했고, 초등학교 1학년 어느 때부터는 삼양동에서 기자촌까지 데려다주는 사람 없이 혼자 그 길을 다녔다. 지금도 그 오르막 20분을 혼자 걸어가는 일이 생생하다. 어린이 혼자 걷기에 짧은 거리는 아니었지만, 할머니를 만날 생각에 숨도 차지 않을 만큼 마음도 몸도 가벼웠다.
그렇게 단숨에 할머니 댁에 도착한 어느 날 일이다. 출발이 늦어서인지 해 질 녘이 다 돼서 할머니 댁에 도착했는데, 인기척이 없었다. 할머니를 불러도 답이 없고, 날은 점점 어두워지니까 불을 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벽에 스위치가 있지만, 예전에는 형광등에서부터 전선이 내려와서 그 끝에 스위치가 달려 있었는데,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다. 의자를 가져와서 깨금발에 까치발까지 해서 손을 뻗어도 스위치가 닿지 않았고, 애를 써도 되지 않고 방은 깜깜해지니 나중에는 초조하다 못해 공포심마저 느끼게 되었다. 하다 하다 스위치를 켜지 못하고, 결국 방바닥에 누워 목놓아 할머니를 부르며 울어버렸다. 할머니는 너무 늦지 않게 오셨고, 오자마자 불을 켜고 나를 달래주셨다.
나한테는 그때의 손에 잡히지 않는 전등 스위치가 어떤 원기억 같은 거로 남게 되었다. 될듯 될듯 안되는 것들, 아등바등해도 결국 실력 밖인 것들의 상징이 되어 인생에서 여러 차례 그날의 기억을 불러낸다. 누구 말마따나 '어쩌다' 강사가 되었다. 강사 일을 하면서 난처한 경험이 한두 번은 아니지만, 여러 일 중에서도 가장 자주 반복되는 곤란한 일 가운데 하나가 어려운 질문을 받는 일이다. 그렇다고 질문을 아예 안 받을 수도 없고… 질문은 그 자체로 위기이고 또 기회이기도 하다. 서로 납득할 수 있는 시원한 답변을 한 경우에는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었을 때의 그 후련함이 있는 것이고, 반대의 경우에는 거짓말 조금 보태면 구덩이에 빠진 기분이다. '내가 왜 질문을 하라고 했을까?' 이 생각뿐이다.
그래서 내 경우에는 질문받을 때, 농담 비슷하게 미리 조치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식이다. "제 강의는 여기까지고요. 혹시 질문 있으세요? 뭐, 이―끝날― 시간에 질문하면 서로 힘든 거 아시죠? 그래도 질문 있으신 분?" 이러면 대부분 웃고 마무리 박수를 친다. 그런데 질문받고 답변하고, 이걸 반복하다 보면, 답변을 제대로 못 하는 것보다 더 불편한 것이 나는 제대로 답변한 것 같은데, 질문자와 청중의 얼굴이 석연찮다는 메시지를 보낼 때이다. 이게 가장 어렵다. 한 번은 중등 교사가 학교에 너무 어려운 학생이 있다고, 이럴 땐 회복적 생활교육 관점에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질문을 했다. 그런 날도 있고 아닌 날도 있는데, 그날은 유독 앞이 깜깜했다. 끝내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선생님, 많이 힘드셨겠어요." 이렇게 얼버무리고 말았다.
쉬는 시간 내내 벽에 머리를 찧고 싶었다. 이어지는 연수에서 그 교사가 다시 손을 들었다. "선생님이 아까 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걸 보고…" 올 게 왔구나. "위로를 받았어요. 아, 내가 무능한 게 아니었구나. 내가 잘못 한 게 아니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선생님이 이렇게 했어야 한다, 저렇게 했어야 한다 답변을 하셨으면 저는 제가 무능하다고 생각했을 거에요." 생각지 못한 말이었는데,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제가 다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제가 치밀한 사람이라 큰 그림을…"하고 크게 웃어버렸다. 내가 생각해도 스스로 대견했다. 물론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 교사가 나를 배려해서 또는 미안해서 한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일로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답변에 관한 강박을 버렸고, 근사한 답변을 해야 유능한 강사가 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모든 질문에 꼭 답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질문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일 수 있고, 답을 얻기 위해서만 질문하는 게 아니다. 힘든 학생을 쉽게 대하는 방법은 없다. 힘든 학생 대신에 까다로운 질문을 넣어도 마찬가지고,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넣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찾는 것은 문제를 쉽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문제에 적절히 대응하는 태도이며, (지난번에 쓴 글에 언급한 대로 https://titus178.tistory.com/219) 어쩌면 문제 상황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알아차리는 분별력과 실제로 하지 않을 수 있는 실천력이다.
어떤 경지에 도달하면 어려운 사람이, 어려운 일이 쉬워질까. 우리는 '쩔쩔매는 사람'일 뿐이다. 쩔쩔매는 것은 무능해서도, 우리가 뭔가 잘못해서도 아니다. 어려운 일은 어려운 일이고, 어려운 사람은 어려운 사람이다. 어려운 일을 어려워하는 것과 어려운 사람을 어려워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인간다운 모습이다. 그리고 간혹 이렇게 쩔쩔매는 사람이 위로가 되기도 하고, 또 간혹 너무 늦지 않은 구원이 찾아오기도 한다. 내게 손이 닿지 않는 전등 스위치는 인생에서 내가 쩔쩔매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실존의 생생함이기도 하고, 너무 늦지 않게 구원이 찾아온 적이 있다는 위로의 생생함이기도 하다. 명쾌한 답보다는 쩔쩔매는 쪽이 인생의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종종 우리는 쩔쩔매는 사람이기에 위로받는다.
자료 출처: lectionary.library.vanderbilt.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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