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우리는 협력하도록 진화했다_『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본문
어려운 상황일 때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있습니까?
해마다 OECD에서는 ‘더 나은 삶의 지수’(BLI :Better Life Index)라는 걸 발표한다. 여러 항목이 있는데, 공동체―혹은 사회과계망의 질―지수에서 한국은 놀랍게도 최하위권이다. 믿기지 않았으나 무슨 질문을 했길래 이런 결과가 나왔나 확인하고는 수긍이 되었다. "당신은 어려운 상황에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있습니까?"
2021년 코로나 팬데믹 때 미국의 퓨리서치센터에서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17개국 사람들에게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요소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14개국 사람들이 1위로 꼽은 것은 '가족'이었다. 한국은 그렇게 응답하지 않은 세 나라 중 하나였는데, 스페인은 건강, 대만은 사회, 한국은 돈(material well-being)을 꼽았다.
손 내밀 데 없는 사람이 가장 믿을 만한 것은 돈일 것이다. 어쩌면 돈이 삶의 의미가 된 것은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는 사람들의 세상이라는 방증인지도 모르겠다.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기가 점점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어지가해서는 혼자 해결해야 '민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생각도 상식이 되어간다. 그러나 자기 일을 스스로 하는 것과 도움 요청할 사람이 없어서 스스로 할 수밖에 업슨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자발적 선택으로 홀로 완전한 상태라면 달리 봐야겠지만, 고독을 넘어 고립으로 가는 것은 피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뿐인 내 편’과 같은 말을 들으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자의든 타의든 보편적 인간관계는 크게 줄었으나 의지할 수 있는 소수의 인간관계에 대한 욕구는 여전하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투게더』라는 책에서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는 직접 경험의 축소가 인간의 사회적 능력을 쇠퇴시켜, 협력이나 연대를 어렵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직접 경험의 축소로 협력 능력을 상실하고, 그 때문에 또 직접 경험이 축소된다. 협력의 부재가 협력의 부재를 강화하는 것이다.
길들여진 마음, 자기가축화
흔히 호모 사피엔스만이 살아남은 이유가 뇌가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다. 화석과 DNA 분석 결과,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 등 적어도 4종의 다른 인류와 공존했는데, 이 중 일부는 현생인류의 뇌 크기와 비슷하거나 심지어 더 큰 뇌를 지녔다. 만약 뇌 크기가 생존의 필수 요소였다면, 그들도 오늘날의 인류처럼 번성해야 마땅하다. 그러니까 뇌 크기는 답이 아니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호모 사피엔스의 필수 생존 요소로 '자기가축화self-domestication'를 꼽는다. 가축화는 '야생종이 사람에게 길드는 과정에서 외모나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는 현상'을 뜻한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귀가 접히고, 꼬리가 동그랗게 말리고, 이빨이 작아지는 등 사람 친화적 변화가 가축화의 증후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런 변화가 사람의 통제 바깥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예가 개다. 일반적으로는 수천 년 전 농경인이 의지를 가지고 새끼 늑대를 키우고 번식시켜서 개로 진화했다고 추정하지만, 이것으로는 개의 진화를 완전하게 설명하기 불가능하다. 자기가축화에 따르면 사람 가까이 올 수 있는 늑대들이 사람 사이에서 번식하면서 점차 가축화되었다고 추정한다. 이렇게 사람이 통제하는 가축화의 범위를 벗어나 자기 의지로 진행된 가축화를 '자기가축화'라 부른다.
인간 역시 진화 과정에서 자기가축화라 부를 만한 변화를 겪었다. 공격성 같은 동물적 본성은 억제되고 친화력을 높이는 쪽으로 진화하면서 협력적 의사소통이 발달하는 사회화가 이루어졌다. 이를 '인간의 자기가축화'라 하는데, 이는 호모 사피엔스가 생존하는 데 필수 조건이다. 인간은 성공적으로 스스로 길들여진 것이다. 진화는 목적 없는 과정이므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길들여진 마음이 인간 설계도에 새겨졌다.
협력적 의사소통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길들여진 마음을 '다정함'이라고 표현했는데, 길들여진 마음이라는 진화된 친화력을 바탕으로 인간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정교한 협력적 의사소통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진화의 결과로 소개하는 것이 손짓과 눈맞춤이다.
주 저자인 진화심리학자 브라이언 헤어는 주로 개를 연구했는데(『개는 천재다』란 책에서 이미 자기가축화를 소개한 바 있다), 개가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 된 이유는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이 키우던 개와 공놀이를 하다가 개가 자신의 손짓을 이해한다는 것을 알고 다른 동물들에게도 이 능력이 있는지 실험했지만, 다른 동물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이 아니라 손을 볼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사람 아기는 생후 9개월이 되면 이걸 할 수 있다. 인간은 언어를 배우기 전부터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을 보인다. 인간과 가장 유사하다는 침팬지와 보노보에게도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그다음이 눈맞춤인데, 다른 영장류는 흰자위 부위인 공막이 짙고 홍채와 뒤섞여 있어서 무엇을 보는지, 어디를 보는지 알아차리기 어렵다(위장형). 하지만 인간의 공막은 색소가 없어 하얗기 때문에 홍채가 뚜렷하게 보인다(광고형). 무엇을 보는지, 어디를 보는지 남이 다 안다는 이야기다.
왜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노출하도록 진화한 것인지 이유는 모르지만, 자기가축화의 맥락으로 보면 우리의 눈은 협력적 의사소통(눈맞춤)에 적합하게 설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생존이 목표라면 위장형이 더 유리하겠지만, 협력이 목표라면 광고형이 더 유리한 것이다. 우리가 손짓과 눈맞춤만으로도 무언가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다정하기게 폭력적일 수도 있다?
타인에게 기꺼이 정보를 주고,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은 우리 존재의 정수다. 사람은 처음에 10명에서 15명 정도의 작은 무리로 살다가 친화력이 높아지면서 100명에서 150명 정도(던 바의 수: 한 사람이 맺을 수 있는 인간과계의 최대치)의 큰 집단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친화력을 선택한 결과 뇌의 역량이 커지고, 규모의 확장과 함께 이전에 없던 새로운 개념이 만들어졌음을 뜻한다.
새로운 개념은 '집단 내 타인'이라는 사회적 범주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이들을 받아들이는 확장된 가족 개념이 생긴 것이다.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같은 편이라고 느낄 수 있는 공동체 의식과 관련된 개념이다. 집단 내 타인이라는 범주는 산모가 아기를 분만할 때 분비되는 옥시토신에 의해 촉발되고 유지되는데, 옥시토신이 충만하면 낯선 사람도 같은 편으로 여기게 된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혁신에 가까운 희망적 변화로 보일 수 있다. 신뢰의 범위가 비약적으로 확대되고, 확장된 가족을 바탕으로 미래를 낙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낯선 이들에게도 친절을 베풀 줄 아는 능력 덕분에 폭력성이 감소하고(스티븐 핑거), 정글의 법칙이 폐지되고, 평화의 시대를 상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유발 하리리).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간 자기가축화의 산물인 '집단 내 타인'이라는 개념은 절망도 함께 가져왔다.
옥시토신은 낯선 이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역할을 하지만, 정반대의 행동도 부추긴다. 아기와 부모가 눈맞춤할 때, 서로에게 분비되는 이호르몬을 '포옹 호르몬'이라고 부르는데, 브라이언은 이를 '엄마곰 호르몬'이라 부르고 싶다고 말한다. 누군가 아기를 위협한다고 느끼면 분노를 솟구치게 만드는 것 역시 옥시토신이기 때문이다. 집단 내 타인이라는 개념은 반대로 집단 외 타인을 규정하게 되었다.
신경과학에서는 사람의 뇌가 익숙한 것을 더 좋아한다고 말하고, 사회심리학에서는 사람들이 자기가 속한 집단 구성원을 더 좋아한다고 말한다. 이 말을 뒤집으면 익숙하지 않은 것과 자기가 속하지 않은 집단 구성원을 덜 좋아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기가축화=협력적 소통'이라는 진화된 친화력을 선택하여 길들여진 마음을 설계도에 새긴 인간의 뇌는 '타인을 비인간화할 수 있는 능력' 또한 갖추고 있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인간의 자기가축화를 설명한다. 생물학과 신경과학적 접근 그리고 심이학과 사회학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후자는 친화력의 어두운 면을 주로 다로 다룬다. 다양한 편견, 차별, 혐오, 적대감 그리고 우생학, 홀로코스트, 제노사이드 등 인간 본성의 결함이라고 말해도 될 만큼 다양한 비인간화의 기록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정하기에 폭력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적자생존'의 오해를 걷어내기
또한 이 책은 '적자생존'의 해묵은 오해를 걷어내려는 시도이기도 한다. 추천과 감수의 글을 비롯한 최근에 나오는 다윈의 진화론 정보를 참고하면, 적자생존은 다윈이 고안한 표현이 아닐뿐더러 진화를 설명하는 적확한 개념도 아니다. 다윈이 말한 적자란 '국소적 환경에 대한 적응 능력' 또는 '살아남아 생존가능한 후손을 남길 수 있는 능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후대에 오면서 가장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차가운 이데올로기로 변해 사회 곳곳헤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최적자fittest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생물학자 최재천은 적자생존을 ‘Suvival of the fitter’로 바꾸어볼 것을 제안한다. 저자는 "자상한 (혹은 가장 정이 많은) 구성원이 많은 공동체가 가장 번성하여 가장 많은 후손을 남겼다"(『인간의 계보』)라는 찰스 다윈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윈을 포함한 많은 생물학자가 오히려 진화의 성공에 더 중요한 요소로 다정함을 꼽았음을 언급한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현대사회의 협력 부재에 대한 해결책으로 다양성이 있는 민주주의의 추구를 제안한다. 브라이언이 이 책에서 결국 하려는 말은 '다정한 것이 살아나믄다'라는 제목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다정하다는 표현이 추상적이기도 하고, 저자가 말하는 결론이 조금 싱겁기는 해서 사회는 경쟁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고 메시지가 강하지 않으므로 우정이나 협력 증진에 관해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과 함께 읽고 대화를 하기 위한 책으로 적당하다. 진화혼을 공부하기 위한 입문서로도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글에서 부분적으로 인용한 리처드 세넷의 『투게더』와 브라이언 헤어의 다른 저작인 『개는 천재다』도 함께 읽으면 좀 더 흥미로운 독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이야기가 있다. 사회학자 새뮤얼 올리너는 유대인 대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유럽인 수천 명이 자기 목숨을 걸고 유대인을 박해와 죽음으로부터 구출했다는 사실을 알고, 이런 일을 한 수백 명의 증언을 분석했다. 거기서 공통점을 하나 발견했다. "그들 모두 전쟁 전에 유대인 이웃이나 친구 혹은 직장 동료와 친하게 지낸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협력의 부재가 스스로를 강화하는 것처럼, 직접 경험 또한 스스로를 강화할 것이다.

계간 『민들레』 2024년 봄호에 실린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