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2025(C)성령강림 후 다섯째 주일 노아교회 설교 본문
작아지는 사람의 은총
오늘은 성령강림 후 다섯째 주일입니다. 열왕기하 5장 말씀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람 사람 나아만 장군의 치유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무협 영화 좋아하십니까? 저도 어린 시절에 성룡 영화 재밌게 본 기억이 납니다. 이런 류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클레셰가 있습니다. 주인공이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스승을 찾아갑니다. 그러면 스승은 무술이 아니라 이상한 걸 시킵니다. 물을 길어 오라든지, 청소를 시킨다든지, 무술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쓸 데 없는 일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오래 시킵니다. 주인공은 불평을 하죠.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마지못해 하면서 농땡이를 피우기도 하고, 또 이유를 물으며 거세게 반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떠날 수는 없습니다. 이 스승은 위대한 사람이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내면의 갈등을 이겨내고 이 사소하고 쓸 데 없는 일을 불평 없이 성실히 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제야 스승은 무술을 가르쳐 줍니다. 제자의 눈빛도 달라졌고, 이제는 빠른 속도로 비기를 습득하고, 복수를 위한 준비를 합니다. 무협 영화의 클리셰와 오늘 나아만 이야기와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챘나요? 나아만은 위대한 인물입니다. 오늘 본문은 나아만이 얼마나 큰 인물이고,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인지 묘사하면서 시작합니다.
큰 사람들
시리아 왕의 군사령관 나아만 장군은, 왕이 아끼는 큰 인물이고,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주님께서 그를 시켜 시리아에 구원을 베풀어 주신 일이 있었다. 나아만은 강한 용사였는데, 그만 나병에 걸리고 말았다.
열왕기하 5: 1-2
지위, 권력, 명예 어떤 면에서 봐도 나아만은 완벽할 정도로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 큰 사람 역시 질병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타고난 조건이나 인간적인 성취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보편적인 인간의 고통 앞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고통 앞에서 인간은 평등합니다.
이후에 나아만의 질병으로 발생한 에피소드들이 비포장 도로처럼 울툴불퉁합니다. 더욱이 나아만과 같은 인물, 인간적인 조건이 큰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이 어지럽게 펼쳐집니다. 이스라엘에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알고, 아람 왕은 아끼는 장군을 위해 이스라엘 왕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금과 은과 의복을 준비해서 함께 보냅니다. 그러나 아람 왕의 이런 개인적인 노력은 이스라엘 왕에게 오히려 부담이 됩니다.
“내가 이 편지와 함께 나의 신하 나아만을 귀하에게 보냅니다. 부디 그의 나병을 고쳐 주시기 바랍니다.”
열왕기하 5: 6
이스라엘 왕은 그 편지를 읽고 낙담하여, 자기의 옷을 찢으며, 주위를 둘러보고 말하였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신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이렇게 사람을 보내어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하니 될 말인가? 이것은 분명, 공연히 트집을 잡아 싸울 기회를 찾으려는 것이니, 자세히들 알아보도록 하시오.”
열왕기하 5: 7
뾰족한 수가 없는 이스라엘 왕은 오히려 이 상황이 부담스럽습니다. 계략이 아닐까 의심을 합니다. 나아만이라는 위대한 인물의 인간적인 조건들이 그의 병에 도움이 되지 않은 것처럼 아람 왕의 친필 서신과 온갖 선물들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만 일으킬 뿐입니다. 나아만을 비롯한 두 나라의 왕이 가진 모든 외적인 권위는 실제 병의 치유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상황만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사람들
자 그럼 실제로 이 상황을 움직이고, 중요한 변화를 이끄는 구체적인 영향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나아만을 이스라엘로 가게 한 사람입니다. 누구일까요? 이스라엘의 전쟁 포로로 시리아에 온 나아만 장군의 아내의 시중을 드는 소녀입니다.
“주인 어른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한 예언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어른의 나병을 고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열왕기하 5: 3
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큰 사람들의 어수선한 상황과 극명하게 대조가 됩니다. 전쟁 포로로 잡혀와 비천한 신분이지만, 이 작은 사람의 작은 목소리가 의미 있는 첫 번째 변화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어지는 엘리사의 처방 역시 맥을 같이 합니다. 단순한 요청입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을 대면하지 않고, 그저 사환을 시켜서 요단 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고 합니다. 요단강은 나아만이 언급하는 다마스쿠스의 아마나 강, 바르발 강보다 더 훌륭한 강이 아닙니다. 규모 면에서 요단강은 결코 큰 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아만은 자신을 직접 대면하지도 않고, 대단하지도 않은 요단 강에 몸을 씻으라는 요청도 모두 다 다음에 들지 않습니다. 분노합니다. 자존심을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을 삭이지 못하고 돌아가려는 나아만을 또 다른 작은 사람들이 설득합니다. 세 번째 조건입니다.
그러나 부하들이 그에게 가까이 와서 말하였다. “장군님, 그 예언자가 이보다 더한 일을 하라고 하였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다만 몸이나 씻으시라는데, 그러면 깨끗해진다는데, 그것쯤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열왕기하 5: 13
나아만을 이스라엘 왕에게로 가게 한 사람, 화가 나서 돌아가려는 그를 붙잡은 사람들 모두 작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태도는 나아만의 지위에 걸맞지 않게 무심하고, 그의 처방도 단순합니다. 아람이라는 강대국이 등장하고, 장군, 왕들의 서신 교환 등 우람한 것들이 차례로 등장했지만, 실제로 나아만 장군의 치유의 과정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은 작은 사람들, 작은 목소리입니다. 우리가 이미 엘리야의 이야기에서 살펴본 것처럼 작은 목소리의 전통이 있습니다.
스스로 작아지는 길
엘리사의 스승 엘리야는 하나님의 임재를 세미한 소리로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세미한 소리로 임재하시고, 작은 사람, 작은 목소리로 일하십니다. 나아만은 단순한 처방에 순종하여 회복되었습니다. 나아만의 병이 낫고 기억되는 사람이 된 이유는 하나님이 엘리사를 통해 하신 일 때문이겠지만, 나아만의 행동도 한번쯤은 살펴볼 만합니다. 그는 푸대접과 납득하기 어려운 제안에 화가 났지만, 아니 어떤 면에서 화를 낼만 했습니다. 결국 순종합니다. 그는 작음 사람,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였습니다.
나아만은 겸손을 배우고, 어린 아이의 살결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겸손하면 아기 피부 한번 도전해 봐도 되지 않을까요. 오늘 나아만의 이야기를 통해서 한국 사회를 바라봅니다.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고 말하면 반대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작은 사람을 존중하고, 작은 목소리를 듣고 태도의 변화까지 시도하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내 일 아닐 때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지만, 막상 저 상황에 놓이면 어려운 일입니다.
신해철의 노래 중에 <민물장어의 꿈>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좁고 좁은 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뿐” 이런 가사로 시작합니다. 진정한 자아의 발견이나 궁극적인 목표점에 도달하는 여정이 자기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여정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게 하는 노래입니다.
정치인이나 리더 등 위정자들이 진짜 들어야 할 목소리는 입이 크고, 목소리가 큰 사람들이 아닙니다. 작은 사람들의 작은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작은 사람들의 작은 목소리는 “너무 사소하다, 너무 개인적이고 협소한 인식이다.”라고 비판받을 때가 있지만, 결국은 그 사소하고, 개인적이고, 협소한 인식에 대한 수용력이 미래가 있는, 건강한 공동체의 비결이기도 합니다.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사람, 작은 목소리를 어떻게 대하는 지가 인격의 잣대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작은 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에게 큰 순종이나 대단한 일을 바라시는 것도 아닙니다. 작고 단순한 순종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작아질 때,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제까지 잘못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 어제까지의 내가 죽을 때, 우리는 초라하고 작아집니다. 그러나 거기서 새로운 삶과 생명이 시작하고, 죄가 은총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바로 그곳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작은 사람들을 존중하고,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깎고 잘라서 작아질 때, 치유과 회복의 길을 허락하시는 주님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삶이 되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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