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왕국절 제3주 (한정훈) 본문
세상에서
가장 값진
대접
“쌀 한 톨의 무게”(홍순관)라는 노래가 있다. 가사가 이렇다. “쌀 한 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빛도 그 안에 숨었네. 농부의 새벽도 그 안에 숨었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었네. 버려진 쌀 한 톨, 우주의 무게를, 쌀 한 톨의 무게를 재어본다. 세상의 노래가 그 안에 울리네. 쌀 한 톨의 무게는 생명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평화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농부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세월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우주의 무게.”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오롯한 존재의 무게를 달아볼 수가 없다. 우리는 보통 자신이 이해한 존재와 깊이만큼 존재를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존재보다 이해가 얕은 경우에는 대접도 가볍기 마련이다. 진실을 관념이나 이데올로기로 또는 교리나 선입관으로 아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반대의 경우에는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말을 쓸 수 있다. 이런 때는 실망이 큰 법이다. 선전으로, 여론조사로, 가격으로는 진실을 알 수 없다. 감춰진 존재의 무게를 달아볼 수 있어야 알맞은 대접을 할 수 있다.
예레미야 18: 1 – 11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 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진흙을 뭉개고 다시 시작한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토기장이 집으로 이끌어 이 광경을 보게 하신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간단했다. “내가 이 토기장이처럼 너희에게 할 수 없겠느냐?” 이 말은 협박일까? 이 말씀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좀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미국의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뜨거운 음료에 입을 덴 할머니가 가게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승소했다. 그래서 뜨거운 음료를 제공하는 가게마다 종이컵에 ‘주의! 이 음료가 매우 뜨거우니 드실 때 조심하세요.’(CAUTION! HOT BEVERAGE) 이 문구를 적는다.
엉뚱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부모는 자녀에게 이렇게 한다. 우리말에 ‘지지’라는 말이 있다. 부모는 더럽거나 위험한 것에 가까이 하려는 어린아이에게 ‘지지’라는 말로 조심할 것을 일러준다. 적절한 때가 될 때까지 부모는 ‘지지’를 쓴다. 협박이 아니라 일러주는 말이다. 예레미야를 통한 경고의 메시지는 자기 백성을 자식 대접하는 하나님을 드러낸다. 코앞까지 다가온 역사의 심판을 피하라고 일깨우는 부모의 말이다. 엄중하고 따끔한 경고임에 틀림없지만 이 메시지를 무겁게 하는 것은 냉엄한 경고의 외침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 길을 열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다. 세상은 약자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세상에서 우리는 고아와 같다.
시편 139: 1 – 6, 13 – 18
인터넷에서 한동안 유행했던 것 중에 재미있는 급훈이 있었다. 그 중에 기억에 오래 남는 급훈은 ‘지켜보고 있다’라는 급훈이다. 어느 학교 급훈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섬뜩하게 지었다. 하나님의 시선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를 표방한 제러미 벤담은 ‘파놉티콘’이라는 감옥을 제안했다. 이 감옥은 소수의 감시자가 모든 수감자로 하여금 감시당하고 있다는 심리적 부담감을 주는 설계로 돼있다. 하나님의 시선은 통제와 구속을 전제로 한 폭력적인 시선이 아니다. 하나님은 감시자가 아니다. 오늘 시편 말씀에서 ‘나를 환히 아십니다’라고 고백한 시인의 말은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어디 나쁜 짓을 하나보자!’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한다는 뜻이 아니다.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식으로 충만한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토기장이 비유와 통하는 데가 있다. 토기장이에게 진흙 반죽은 의지가 반영되지 않는 하나의 객체이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릇 제조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동반자로 대접하신다(렘 18: 5 – 11, 독일성서공회 해설 참조). 동반자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의 무게를 확인하고 이해하는 관계이다. 세상 권력은 불친절하다. 설명하지 않고,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그 한 예가 감시이다. 감시는 일방적인 시선이고, 외길이다. 그래서 불통을 전제로 한다. 권력자는 감시를 통해 약자를 착취하며, 이렇게 짜낸 물로 욕망이라는 대접을 채운다. 그러나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앎은 서로를 동반자로 엮는 끈이다. 한 마음이 되어 채우는 대접은 바닥나는 법이 없다.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 이야기 그리고 밤새 형은 아우네 집에, 또 아우는 형네 집에 서로 쌀가마니를 몰래 가져다 두었다는 옛 이야기가 떠오른다.
누가복음 14: 25 – 33
하나님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환상이다. 하나님은 전부를 원하신다. 그러나 다 싸가지고 와서 나에게 받쳐라가 아니다. 다 버리고 빈손으로 오라신다. 준비가 됐냐고 물으신다. 뭘 줄 건데 하는 사람은 거래하려는 사람이다. 그러나 함께 그 길을 가려는 사람은 준비가 다 되었는지 묻는다. ‘자, 이제 가자.’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를 따르는 많은 무리가 있는데 예수는 그 중에서 제자를 걸러내려고 하신다. 많은 무리 중에 자신이 하나님의 군사,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자신이 준비된 사람인지 준비되지 않은 사람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흔히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쓰신다 하여 지나온 인생길에 자신이 없는 사람을 더욱 주눅 들게 하는데, 하나님은 깨끗한-다 비운- 그릇을 쓰신다. 하나님의 준비는 채움이 아니라 비움이다.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다 비운 사람을 예수는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부른다고 약속하셨다(요 15: 15).
빌레몬서 1: 1 – 21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를 쓴다. 오네시모를 친구요 형제로 받아들여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다. 빌레몬은 바울에게 생명을 빚진 사람이다(9, 아마도 바울을 통해 회심한 사람일 것이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빚을 탕감해 달라고 부탁한다. 명령해도 될 관계지만 부탁한다. 그리고 바울은 빌레몬의 순종을 확신하며 편지를 쓴다(21).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돌려받는 종이라 생각하지 말고, 형제로 맞아 주라고 부탁한다. 바울이 한 부탁의 무게는 빌레몬이 혼자 지기에는 무거운 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바울은 관계적인 말들로 빌레몬을 설득하고, 최대한 부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또 한 사람은 이 편지를 들고 빌레몬 앞에 가야 할 오네시모이다. 그는 아마도 이 편지의 내용을 알았을 것이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난날을 후회했을까? 아니면 당당했을까?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과거의 무게는 아주 무거운 인생 짐 가운데 하나이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과거의 무게를 함께 졌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진심으로 편지를 써준 사람을 만난 오네시모는 이미 자유를 맛보았을 것이다. 빌레몬에게 가는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겠지만 죄책감에 짓눌린 마음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빚진 마음으로 갔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빌레몬이 자신을 ‘용서하지 않더라도 괜찮아’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오네시모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대접을 받았다. 종으로 살았던 그의 인생은 아마도 철저히 남의 발아래 있어야 하는 하찮은 자리였을 것이다. 누구도 그의 인생의 무게를 함께 지어줄 사람은 없었다. 종은 이리저리 팔고 팔리는 소유 정도였다. 그런데 바울은 이 오네시모를 사람대접한다. 그거면 된 거다.
듣그러운 전도가 판치는 세상이다. 존재의 무게를 달아보려는 마음 없이 상대방을 함부로 대하고, 하찮게 대하는 전도자가 득실댄다. 그러나 전도한다는 것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구원 받아야 마땅한 존재라는 인정에서 시작돼야 한다. 그래서 전도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대접에 예수를 담아 건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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