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왕국절 제7주 (한정훈) 본문

성서일과에 따른 설교준비노트/year C(다)

왕국절 제7주 (한정훈)

한, 정훈 2013. 10. 8. 20:00

생명은

죽음에

저항한다

 

 

 

 

 

예레미야 3: 19 – 26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25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대체로 우리는 아픔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몸 어딘가가 썩어 들어가는데도 아프지 않다면, 이보다 더 난처한 일이 있을까? 문제는 우리의 아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에 있다. 오히려 아픔은 ‘살아 있음’의 징조이며, ‘살아야겠음’의 경보라고나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픔만을 강조하게 되면, 그 아픔을 가져오게 한 것들을 은폐하거나 신비화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진실은 우리가 지금 ‘아프다’는 사실이다. 그 진실 옆에 떨어져 나갈지 모른다는 불안한 느낌의 뒤범벅이 우리의 행복감일 것이다. 망각은 삶의 죽음이고, 아픔은 죽음의 삶이다(이성복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뒤표지 중에서).

 

예레미야 애가는 고통에 존엄을 부여하는 성경의 육성 증언이다. 고통에 대한 생생한 서사가 눈을 찔끔 감고, 고개를 돌리게 만든다.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고, 어찌 보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고통을 겪으며 산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는 생명의 함성이 고통을 이기고 죽음을 떨게 한다. 하나님의 심부름꾼은 이 진실을 믿는 사람이다. 성경은 고통이 무엇인지 설명하거나, 고통을 어떻게 하면 제거할 수 있는지에 관심이 없다. 그런 원칙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그 고통의 한 가운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그로써 고통에 존엄성이 부여된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고통의 존엄이라 하는 것은 고통 자체를 미화하려는 말이 아니다. 고통의 존엄은 꼭 고통이 해결할 때만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외적인 조건에도 굴복당하지 않는 영혼의 자유를 믿는 사람들이고, 영혼의 자유는 끊임없이 죽음에 저항한다. 인간으로써 생명의 역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진보나 성취 너머를 이상으로 삼는 일이며, 이 웅장한 단 하나의 전망은 죽음의 역사를 거스르는 한 길을 걷는 실천으로 드러난다. 삶이란 말 그대로 사는 일이며, 사는 일이라는 말은 곧 죽음에 저항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시편 137: 1 – 96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6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7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8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9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이 탄원시는 주전 587년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난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보여 준다. 그들은 여러 강가에 모여 시온의 때를 회상한다. 이 모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조직적인 탄원 의식에 가까웠을 것이다(독일 성서 공회 해설 참조). 강변에 앉아 고향땅을 회상한다. 눈물이 흐른다.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들이 속에서부터 치오르는 설움에 몸부림치는 광기와도 같은 슬픔으로 가득 찬 강변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생명의 존엄을 비웃는 악의 일상성이다. 압제자는 자신의 흥을 돋우라며 시온의 노래를 하나 해보라고 한다. 별 생각 없이 일상의 지루함을 쫓아보려는 요구였을 이 제안은 누더기라도 집어 들어 수치를 가리고 싶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며 폭력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 밖에 존재하는 사람, 타인의 슬픔을 쇼윈도 위에 올려놓고 소비하려는 사람의 일상은 슬픔을 겪는 사람을 더욱 하찮게 만든다. 세상은 이런 냉정한 현실로 가득 차 있다. 모욕과 폭력에 저항하는 방법을 찾는 길은 ‘기억’이라는 세계에 있다. 기억은 고통에 저항하는 방법이다. 어떻게 우리가 무너졌는지, 어디서 우리의 존엄을 짓밟혔는지, 언제 우리가 하찮아지는지 기억하고 전복을 꿈꿔야 한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저항해야 한다. 이때 저항을 통한 전복은 힘의 싸움이 아니라 긍지의 싸움이다..


디모데후서 1: 1 – 14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3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현실을 가득 메우는 죽음의 역사는 연민이 없는 압제자의 조롱과 폭력으로 드러난다. 저항하게 하는 보다 근본적인 생명 활동에 대한 믿음 없이는 그 길에 끝에 다다를 수 없다. 오늘 신약 본문에는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는 소명과 복음의 부름이라는 함성이 곳곳에서 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 함성만이 잿빛으로 가득한 현실을 진실로- 또는 진실로써- 새롭게 한다. 어떠한 죽음의 역사에도 압도되지 않는 생명의 역사가 스스로 길을 내갈 때 존엄의 함성이 터져 나온다. 이 웅장한 함성에 인생을 거는 것이 곧, 세상을 이긴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 참여하는 위대한 과업에 참여하는 일이다.

사람은 너무 큰 소리는 듣지 못한다. 귀가 없어서가 아니다. 죽음에 저항하고, 오늘을 새롭게 하는 생명의 역사의 소리는 너무도 크기 때문에 들을 귀 있는 자에게만 들린다. 일상이 된 폭력에 길들여진 자는 이 소리를 듣지 못한다.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아우성을 듣고, 하나의 전망을 품고, 한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복이 있다. 비록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복되지 않은 소식이 넘쳐나지만, 죽음의 역사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생명의 역사가 불길한 전망을 전복시키는 거대한 불길이 되고 있음을 보는 사람은 복이 있다. 생명은 죽음에 저항하여 끝끝내 존엄을 일구어낼 것이다. 생명은 죽음에 지지 않는다..

 

누가복음 17: 5 10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생명의 역사는 우리가 꿈꾼 시간이 아니다. 생명의 함성은 우리가 시작한 목소리가 아니다. 생명의 물결은 우리가 시작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 우렁찬 함성에 참여한 작은 목소리일 뿐이다. 세상을 내 손으로 뜯어 고친다는 것은 달콤한 환상일지 모르며, 자의식이 과잉된 상태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의식은 내가 세상을 고친다는 자의식이 아니라 흐린 물줄기에 주춤거리지 않고, 강을 향해 바다를 향해 검질기게 흘러가는 맑은 물을 바라보는 뿌듯함이다. 다시 말해 죽음에 저항했다고 하는 긍지이다.

매듭은 하나님이 짓는다. 우리는 이 전망이 진실임을 믿고, 은총에 기대어 죽음에 저항해야 한다. 악이 정복된 그 날의 영광은 은총의 결과이지, 의지의 결과가 아니다. 자의식을 비워낸 그릇에는 자기연민이나 고집이 자리 잡을 자리가 없다. 거기에 생명의 존엄이 넘치게 담기는 까닭이다. 긍지는 성취로 평가되지 않는다. 겨울을 이기고 나온 연두색 잎사귀나, 겨울의 문턱에 모든 잎사귀를 떨군 앙상한 가지나 모두 존엄하다. 오롯이 죽음에 저항한 기억을 붙들고 있다. 저항했노라고, 생명을 하나의 전망으로 삼은 모든 존재는 웅장한 존엄의 함성을 듣고, 죽음에 저항했노라고 말할 긍지를 누리게 된다. 이 길에 끝에서 주를 보았다고 하는 찬양을 올릴 수 있게 된다. 고통이 살고 있는 모든 존재가 앓고 있는 증상이라면, 긍지는 죽음에 저항하는 존재에게 허락된 은총의 증상이다. 창조에 기여하고, 생명의 역사에 참여했다는 이 벅찬 마음. 사는 일은 죽음에 저항하는 길이다. 죽음에 저항하는 생명은 웅장한 함성이며, 우람한 물줄기다..

댓글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