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길이 보이면 걷고 싶다 본문
내가 나고 자란 전통은 계속해서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한다. 툭하면 예수를 만난 감격을 비웃고, 창조에 기여하고 싶다는 진실한 고백을 하찮게 대한다. 그래서 고향집을 버리고 다른 전통을 찾아야 하나 쉼 없이 고민했다.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줄에 묶인 강아지처럼 줄이 팽팽해 질 때까지 마음만 앞섰다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한 게 몇 번인지...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 시간도 공간도 잊을 만큼. 그러다 어떤 선생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당부의 글귀를 보고, 조용하지만 나를 부드럽게 채우는 울림을 느꼈다. 집에 오자마자 이블린 언더힐의 <예수그리스도의 신비주의>를 펼쳐들었다. 읽지 않고, 봤다. 가방에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가 들어있다. 기억으로 책장을 넘기도 밑줄을 그었다. 그리고 비루한 전통에 삿대질하는 글을 쓰고 있다.
한결 같게 집을 지킨 형보다 집 떠난 못난 아들이 아버지 품에 다시 안겨 영적으로 더 성장했다고 믿는다. 경계에 서서 안지도 서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나와 화해하고, 온유하게 저항하며 살고 싶다. 굳은살이 박히면 통증은 사라지지만 굳은살이 곧 실력은 아니다. 지난날 실수와 허물 때문에 내내 마음 졸이며 주뼛거렸지만, 이제 길이 보이면 망설이지 말고 걸어야겠다. 걷고 걸으면서 나그네에게 없어도 되는 짐은 훌훌 털고, 깊이 있는 열정으로 오늘을 살고 싶다.
이해가 안 되면 이해해주지 말아라. 취향에 맞지 않으면 못 본채 지나쳐라. 오디션 보는 게 아니니 점수를 매겨주지 않아도 된다. 나는 지금 시를 쓰는 거고, 또 앞으로도 시를 쓰고 싶은 거다. 붙들고 싶은 게 아니라 버리고 싶은 거다. 착한 척이 아니라 살아있고 싶은 거다. 낱낱이 파헤치고 싶은 게 아니라 중심을 붙들고 싶은 거다. 거칠어지지 않으면서 세상을 알아가고, 상처받지 않으면서 사랑할 때까지 오늘을 모조리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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