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2025(C)성령강림 후 열다섯 번째 주일 노아교회 설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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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C)성령강림 후 열다섯 번째 주일 노아교회 설교

한, 정훈 2025. 9. 21. 16:00

슬픔을 아는 사람


오늘은 성령강림 후 열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예레미야를 마지막으로 읽는 오늘, 우리는 더 이상 날카로운 심판의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을 전해야만 하는 예언자의 눈물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눈물 속에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게 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길을 잃고 무너질 때, 우리와 함께 아파하는 사람, 우리와 함께 눈물 흘리는 하나님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사역 내내 심판을 선언했지만, 실은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의 시작을 말한 선지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사역 내내 아파했고,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의 번뇌가 극적으로 표현된 구절입니다. 왜 그가 눈물의 선지자일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모두의 상처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가 멸망한 백성의 입장과 하나님의 입장 둘 모두를 대변하는 모습이 드라마처럼 구성된 본문입니다. 백성의 탄식과 하나님의 응답을 왔다 갔다 하면서 전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백성의 절망과 이를 아파하는  ̄자신의 마음이자 ̄ 하나님의 마음이 번차례로 기록되면서 양쪽 모두의 상처 입은 심정을 드러냅니다. 예레미야가 겪은 일을 통해 우리는 ‘작은 왕국 유다가 멸망을 향해 걷잡을 수 없이 나아갈 때, 그 나라의 예언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봅니다(엘런 데이비스, 『히브리 성서를 열다』 438).

유대 백성은 다윗의 언약을 받았고, 성전을 정체성의 한가운데 둔 백성이지만, 이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로 인해 자기와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읽지 못하는, 그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되어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우상을 숭배하는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왜 우리가 고통받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울부짖는 백성의 물음에 이렇게 답하십니다.

(백성이 울부짖는다.) “이제 주님께서는 시온을 떠나셨단 말인가? 시온에는 왕도 없단 말인가?”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어쩌자고 조각한 신상과 헛된 우상을 남의 나라에서 들여다가, 나를 노하게 하였느냐?”
예레미야 8: 19

이 말은 겁주고 몰아세우는, “이게 다 너 때문이야!”라고 하는 탓하는 말이 아니라 예레미야의 육성으로 전해지는 역사의 역학 관계에 대한 통찰이 담긴 서술입니다. 이어지는 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멸망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유다 백성은 울부짖지만, 하나님은 이번에도 예레미야의 입을 빌어 이스라엘의 하나님, 히브리 민족의 아버지 또한 억장이 무너졌음을 서술합니다.

(백성이 또 울부짖는다.) “여름철이 다 지났는데도, 곡식을 거둘 때가 지났는데도, 우리는 아직 구출되지 못하였습니다.” 나의 백성, 나의 딸이, 채찍을 맞아 상하였기 때문에, 내 마음도 상처를 입는구나. 슬픔과 공포가 나를 사로잡는구나.
예레미야 8: 20-21

공감하는 사람

여기서 우리는 예레미야가 유다 백성의 마음도 알고, 하나님의 마음도 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메시지가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서 심판을 전해야 하는 메신저의 심정을 읽어야 합니다. 예언자는 공감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한쪽이 아니라 심판의 대상과 심판을 허락하는 대상 모두를 공감합니다. 이것이 인간 예레미야, 예언자로서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인생의 무게입니다.

여러분, 우리와 세상은 아름답습니까? 아니면 추합니까? 인생과 이 세계에 희망이 있을까요? 아니면 희망 고문일 뿐일까요? 쉽게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아름답기도 하고, 희망도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추하기도 하고, 모든 것이 헛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너져 가는 것을 아파하는 사람이 어느 시대나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비관적으로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정직하고, 섬세하게 보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며 떠오른 사람은 윤동주 시인입니다. 그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고, 별을 헤아리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고향을 그리워하고, 무력감에 짓눌리면서도 끝내 시를 쓴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산 시대와 전혀 다른 시대를 살지만, 그를 비관적이라 하거나 그의 시를 우울하다고 낮출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윤동주가 쓴 「팔복」이라는 시를 좋아합니다. 한번 소개한 적이 있으나 다시 공유하겠습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민족의 아픈 현실에 속박된 윤동주의 시에서 상처받은 유다 백성과 같은 아픔을 겪는 하나님의 마음을 동시에 공감하는,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 속박된 예레미야의 무력감이 읽힙니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떨어졌느냐? 그 곳에는 의사가 하나도 없느냐?” 어찌하여 나의 백성, 나의 딸의 병이 낫지 않는 것일까? 살해된 나의 백성, 나의 딸을 생각하면서, 내가 낮이나 밤이나 울 수 있도록, 누가 나의 머리를 물로 채워 주고, 나의 두 눈을 눈물 샘이 되게 하여 주면 좋으련만!
예레미야 8: 22-9: 1

그는 외부자가 아니라 내부자입니다. 낫게 할 수 없음으로 울 수밖에 없는 비극의 사람입니다. 거룩한 행위 없이 성소만을 신뢰하는 것은 종교적 망상이며, 우상숭배와 다름없음을 폭로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경고해도 귓등으로만 듣는 인간의 완고함과 죄가 있으면 벌해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로움이라는 압도적인 입장의 대립에 사로잡힌 존재입니다. 그는 이 운명에 속박당했습니다.

슬픔을 아는 사람

예레미야가 예언한 대로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합니다. 그러나 유다의 역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승리의 전차 뒤로 쇠사슬에 묶인 포로들이 줄지어 끌려’가지만(본 회퍼), 하나님은 그 속박의 위력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희망과 승리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제가 다음 주에 부재함으로 함께 읽지 못하는 예레미야의 마지막 본문이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뜻에 이끌리어 고향땅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 내용이 기록된 예레미야 32장 말씀입니다.

예레미야가 밭을 살 때는 이미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입니다. 모두가 예레미야의 행동을 바보같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땅을 사고 매매계약서를 옹기그릇에 담아 봉인한 뒤에 땅에 안전하게 보관합니다. 이는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다시 집과 밭과 포도원을 살 것이다.”
예레미야 32: 15

예레미야는 멸망하는 유다 백성과 한 운명이었고, 사랑하는 민족을 심판해야만 하는 하나님의 상처를 아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슬픔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교회가 기쁨도 만족도 알아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슬픔을 알아야 합니다. 슬픔을 안다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안다는 것이고, 인간의 연약함을 안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형편없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한 현실에 속박당하지 않고 구원을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름답지만도, 추하지만도 않습니다. 공존합니다. 이런 복잡한 현실 속에서 교회는 이 시대와 이 땅에 사는 사람들과 같은 운명으로 속박된 존재여야 합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외부자의 관점으로 세상을 비판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과 같이 아파하고, 아파하는 세상에 상처받는 하나님과 함께 상처받는 곳이 교회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 무거운 속박 속에서도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끝내 이루시는 승리와 회복의 날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슬픔을 아는, 그래서 하나님께 붙들린 승리의 날을 맞이하는 복된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C)성령강림 후 열다섯 번째 주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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