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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삶으로의 여행

한, 정훈 2012. 3. 5. 21:34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가르칠 수 있는 용기,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다음 내가 만난 네 번째 파커 팔머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을 읽었다. 퀘이커 신자들의 전통에 뿌리를 둔 신뢰의 서클의 정체성과 철학, 운영 방법까지 친절하게 안내하는 책이다. 파커 팔머가 시를 읽는 게 좋고, 동양 고전에서 깨달음을 찾는 게 좋다. 그의 길과 내 길이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그가 걸어간 길이 내가 걸어갈 길에 길라잡이 되는 걸 또렷이 알았다.

 

내가 신뢰의 서클을 만들고 이끌어 가게 될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 정신과 방향성만큼은 꼭 배우고 따르고 싶다. 누구나 자의식 이면에 더 근본인 내면’(영혼)이 있다. 나는 그게 하나님의 형상이라 믿는다. 예수가 베드로에게서 본 게바’,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던 참 이스라엘 사람’, 우레와 같은 요한 안에 있는 사랑의 사도이런 게 각 사람들의 참 모습이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작지만 완전한 가 깃들어 있는 자리가 내면이고 그게 곧 영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내면은 잃어버릴지언정 소멸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삶을 여행이라고 부를 때 온전한 삶은 내면이 이끄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책제목처럼 그런 삶이 온전한 삶이라고 이해한다.

 

자의식을 부추기고, 자신을 최대한 고양시키고, 효과적으로(과장되더라도) 홍보하고, 흑과 백을 선명히 나누고, 의지가 감수성과 상상력까지 삼켜서 정직한 인식을 자신의 세계관 안에 가두는 폭력까지도 서슴지 않는 그런 삶의 방식이 나는 싫다. 아니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이 두려움을 기반으로 하는 분노와 분석을 딛고 서있는 까닭이다. 이상과 현실은 실존 안에 하나다. 그런데 이 창조적인 긴장을 거부한 불씨가 분노와 분석이라는 땔감으로 옮겨 붙은 불길이 객관적 이성이다. 관계의 소중함을 타 태워버리는 불이 스스로가 뜻매김한 부정과 부패를 사르겠지만 결국 자신의 영혼까지 재가 될 것이다.

 

1. 내면의 가르침과 괴리가 있는 삶을 거부해야 한다. 가면을 쓰는 것은 자살행위다.

 

2. 다른 사람을 바로 잡으려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내가 할 일이 아니라 타자의 내면이 교사가 돼서 할 일이다. 내면은 야생동물과 같기 때문에 자의식이 펄떡대며 뛰어 다닐 때는 나타나지 않는다.

 

3. 뫼비우스의 띠처럼 인생은 숨을 곳이 없다. 겉과 속은 완벽한 구분으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인정하면서 존재한다.

 

4. 실효-혹은 실용-이 아니라 신뢰가 생명을 보존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나비 이야기가 이를 지지한다.

 

5. 지나치면 모자란 만 못하다 하였다. ‘가 아니라 이 필요한 세상이다.

 

6. 장자 달생편에 나오는 목공이야기는 부드럽지만 강한 것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비우지만 채우는 게 무엇인지 설명한다. 진정 어개에 힘을 뺀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오래 생각하고 싶은 이 책의 알짬이다.

 

7. 누군가를 판단할 수 있지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판단하는 사람을 넘어선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조건을 동일하게 하면 어땠을까 하는 물음은 우문일 뿐이다. 그러나 다르기 때문에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니라 다름이 같음과 맞닿아 있고, 사고와 삶의 간격이 극복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정직하고 열린 질문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8. 마음속에서 풀리지 않는 모든 물음들에 대해 인내하라./ 물음 그 자체를 사랑하라./이제 그 물음 속에 살라./ 그러면 서서히,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먼 어느 날 그 답을 살고 있으리라.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구다.

 

9. 침묵과 웃음이 가장 좋은 저항 방법이다.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가 이를 지지한다. 보란 듯이 증명하는 방식을 버리고 침묵과 웃음으로 존재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저항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폭력은 저항이 아니라 동화(同化).

 

10. 키아바의 미소가 떠오른다. 싸울 것인가 도망칠 것인가? 양자택일의 사고틀에 갇힐 때 기억하자. 3의 길이 있다. 비극적 간극에 서 있는 건 심장이 찢어지는 것을 담보한다. 그러나 심장이 찢어져야 심장 위에 놓인 말씀이 심장 안으로 들어간다.

 

11. 마지막으로

 

왜 그런지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그 대답은 거울 속에 있었다. 내가 자꾸 늙어가기 때문이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모든 일이 쉬워지는 건 아니다. 요즘은 하룻밤 내내 잠들어 있기가 어렵고, 무엇 때문에 이층으로 올라왔는지 기억하기 어렵고, 여러 과제를 동시에 해내기가 어렵고, 책을 시작하기도 끝마치기도 어렵다.

그러나 다른 일들은 좀 더 쉬워졌는데, 그중 하나가 나 자신이 되는 일이다. 세월은 내게서 나 자신을 속이는 데 필요한 기력, 그리고 동기도 앗아갔다. 나는 어떤 일로 누군가를 속여야 한다는 느낌보다는 내게 허락된 시간만큼 나 자신으로서 여기에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내가 이 세월의 선물을 받는 날은 대단히 축복받은 날이다. 그런 날에는 뾰족한 바위 위에 외로이 선 뱅크스소나무처럼 나의 존재 자체에서 나오는 단순한 성실성으로 이 세상에 서 있을 수 있다(245). ...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이 단순한 사실을 맞아들이면서 아울러 참자아도 맞아들인다. 생명의 선물은 그저 잠시 우리의 것임이 분명해지고, 분리되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 어리석지 않은 길이기에 그것을 선택한다(246).

 

할 수 있다면 그와 마주앉거나 같이 걸으며 묻고, 듣고, 침묵하고, 함께 웃고, 먹고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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