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성령강림 후 제10주 (한정훈) 본문

성서일과에 따른 설교준비노트/year C(다)

성령강림 후 제10주 (한정훈)

한, 정훈 2013. 9. 17. 16:40

1.

실제로 설교를 하고 나니 다소 엉뚱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쨌든 제목을 '성경의 관심'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관심이 하나님의 관심과 완전히 일치하는 단어인지 왠지 확신은 없습니다만 말씀이 다른 것 즉, 자기계발, 철학 등과 무엇이 다른지 함께 생각해보았습니다.


2.

결론적으로 성경의 관심은 '살게 하는 것'입니다.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의 삶을 통해 이스라엘의 실상을 드러내셨습니다. 긍휼히 여김 받은 백성이었지만 실상은 전혀 긍휼히 여김 받지 못한 백성이었습니다(로루하마). 선택 받은 백성이었지만 실상은 전혀 선택 받은 백성이 아니었습니다(로암미).


그러나 성경은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통해 다시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표현합니다. 마음에 깊이 남는 구절은 10절,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입니다. 성경의 관심은 절망을 주려는 게 아니라 절망의 자리 '그 곳에서' 다시 살게 될 것을 희망하게 합니다.


3.

값었는 것과 값싼 것은 다릅니다. 시편 85편에는 계속해서 '돌아오게'(1절), '덮으셨나이다'(2절), ''거두시며', '돌이키셨나이다'(3절), '돌이키시고', '거두소서'(4절),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에 진노하시겠나이까'(5절), '다시 살리사'(6절) 절망의 자리에서 희망을 붙드는 표현들이 반복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렇게 하실 것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몫이 있습니다. '다시는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8절)


4.

바울은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8절) 경고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세상의 전통이나 학파의 대를 잇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길은 철학의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철학적 접근과 철학적 사고를 부정하고 관념을 하찮게여기고 행동주의에 빠지라는 말 또한 아닙니다. 철학은 질문하는 것으로 성찰을 돕습니다. 자신을 검사하려는 좋은 시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질문하지 않고 대답합니다. 철학에서 최종적 답변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질문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애초부터 답을 제시합니다. 이 말은 답을 아는 독선적 태도를 가졌다는 말이 아니라 철학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신앙은 철학이 묻는 궁극적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질문 없는 대답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질문에만 그친다면 신앙은 호기심을 채우는 시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사람을 찾는 하느님> 참조).


5.

스톡데일 패러독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짐 콜린스가 쓴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페트남 전쟁 포로였던 스톡데일 대령이 살아돌아와 고국에서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낙관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죽었다." 포로 수용소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막연한 희망을 품습니다. '이번 부활절에는 여기서 나가게 될거야.' 이런 막연한 기대가 거절 되면 병이 들거나 자살을 했습니다. 이런 막연한 희망과 거절이 반복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스톡데일 대령은 살아돌아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언젠가는 여기서 나가게 되겠지만 지금은 아니야"라고 하는 검질긴 마음을 가졌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는 기도를 가르칩니다. 내용보다 중요한 것이 태도입니다. 그래서 주기도 후에 떡을 꾸러 온 친구이야기를 하시고, 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 가르칩니다. 성경의 구해도 될 것과 구하지 말아야 할 것, 줄 것인가 주지 않을 것인가를 냉철하게 구분하는 것보다 확신을 가지고 구하게 하는 일에 관심을 둡니다. 신앙은 고민이 아닙니다. 고민 없이 믿음으로 나아갈 수가 없겠지만 신앙의 목표는 고민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의 모습을 낱낱이 분석하는 것은 신앙의 목표가 아니라 철학의 목표입니다.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지 매섭게 질문하는 것은 자기계발의 목표입니다. 신앙의 목표는 자기 검사를 통해 드러나 자기 실체가 너무 불편하지만 하나님께서 받아주신다는 사실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교육의 목표는 의식의 인식의 성장을 끊임없이 붙들어 악을 억제하는 것이지만 신앙의 목표는 타자가 드러내는 악의 모습에서 자신의 본성을 발견해내는데 있습니다.


6.

결론적으로 성경의 관심이 살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다른 말로 '비타협적인 또는 궁극적인 긍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삶과 존재를 주변 환경에 압도되지 않고 긍정할 수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값없는 은혜보다는 값싼 은혜에 현혹되어서 자기계발과 철학, 의식의 성장 등으로 신앙의 알짬을 흐려놓았습니다. 한 영혼이 완벽한 절망을 뚫고 참 생명을 긍정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힘도 아니고 능도 아니고 오직 성령으로 되는 일입니다.


<출처 : http://www.campusweek.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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