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성령강림 후 제8주 (한정훈) 본문
1.
하느님은 의미한다. 곧 사람은 그 누구도 혼자가 아님을, 일시적인 것의 본질은 영원한 것임을, 순간은 무한한 모자이크 안에 있는 영원의 상임을, 하느님은 의미한다. 곧 거룩한 타자성 속에 모든 것이 어우러져 있음을(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133). 자신의 삶, 존재의 의미는 '자아'에서 찾는 게 아니라 '이웃'에게서 찾아야 한다. 결국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내가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 주고 있는지를 통해 드러난다. 제목은 <내가 믿는 하나님>이다.
2.
구약 본문은 아모스 7 : 7 - 17절이다. 아모스 7장에는 하나님께서 보이신 세 가지 환상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 구약 본문은 그 중에서 세 번째 환상, 곧 다림줄 환상을 다룬다. 아모스는 주께서 다림줄을 잡고 담 곁에 서신 것을 본다. 여호와께서 물으신다.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아모스는 “다림줄입니다.” 대답한다.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에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파괴될 것이다.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칠 것이다.”
아모스 7: 1 – 6절에서는 환상을 보고 아모스가 청원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여 청하건데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2, 5절) 이에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으므로 이것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셨다. 그런데 다림줄 환상을 본 이후로 아모스는 침묵한다. 더 이상은 말릴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모스는 자신이 여호와께 받은 메시지를 전한다.
그런데 왕립 성소를 맡아보던 우두머리 제사장 아마샤가 내란죄를 뒤집어 씌워 아모스를 북왕국에서 쫓아낸다. 아울러 성소에서 예언하는 것도 금했다(독일 성서 공회 해설 참조).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 아모스가 입을 연다.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고,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했다(살전 5: 19 – 20).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 네가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지 말며 이삭의 집을 향하여 경고하지 말라하므로, 네 아내는 성읍 가운데서 창녀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측량하여 나누어질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갈 것이다!” 한 치의 양보도 없다. 서슬이 시퍼렇다. 좋으신 하나님? 부드럽고 촉촉하고 달콤한 신앙의 이미지는 여기 발붙일 데가 없다.
왜 하나님이 화가 나셨는지, 왜 아모스는 세 번째 환상을 본 이후에 더 이상 말릴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형편에 자기 자신을 위한 청원의 기도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지로 국가와 민족의 몰락이 초읽기에 들어갔는데 개인적 만족과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신앙 따위는 꿈도 꾸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모습이 낯설다. 힐링의 시대에 화가 난 하나님,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만큼 냉정하게 심판하실 하나님의 표정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우리는 지금 성령강림절, 성령의 계절을 지나고 있다. 요한복음 16: 7 – 11절을 보면, 예수께서 떠나시면 보혜사를 보내주신다고 했다. 그리고 파라클리트(Paraclete), 위안자(慰安者), 변호자(辯護者), 보호자(保護者), 수호자(守護者) 즉,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죄, (정)의,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 잡아 주실 것이라고 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고,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정의고, 세상의 권력자는 심판을 받았다(요 16: 33 –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김흥호 <신의 아들 예수,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 335-354).
3.
시편 본문은 시편 82 : 1 - 8절이다. 이 시편 역시 환상으로-또는 상상력으로- 시작한다. 신들의 모임 가운데서 다른 신들을 재판하시는 하나님을 본다.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을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도 못하고, 분별력도 없이 어둠 속에서 헤매고만 있으니, 땅의 기초가 송두리째 흔들렸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신들이고,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이지만, 너희도 사람처럼 죽을 것이고, 여느 군주처럼 쓰러질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에 정의를 위해서, 튼튼한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 애써야 할 이들이 정의를 잃어버렸다. 자신의 판단에 의해 세상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알면서도 불공평한 판단을 하는 이들이 죄를 짓는다.
시인은 마땅히 세상에 정의를 바로잡기 위해서 애써야 할 이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청원한다. 시를 지어 탄식하며 호소한다. 우매한 백성들을 도와야 할 이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배를 채워줄 부자와 악인들 편을 들고 있다. 그래서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가 신음하고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가진 지위는 신에게 위임 받은 것처럼 책임 있는 자리라는 것을 모르고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다. 진정으로 들어야 할 소리를 못 듣고, 진정으로 알아야 할 진실들을 깨닫지 못 하고 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인이시다(8절). 이 진리를 붙들지 못한다면 심판을 받는다. 받을 것이다. 아니 받은 것이다. 이제까지 그 어떤 권력도 영원하지 않았다. 반드시 심판 받는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고,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정의고, 세상의 권력자는 심판을 받았다(요 16: 9 – 11). 참된 것만이 영원하다. 자비심이 없는, 가난한 자들을 억누르는 부와 권력은 반드시 소멸한다. 선에 의해 심판받는다.
4.
신약 본문은 골로새서 1 : 1 - 14절이다. 에바브라는 그리스도의 듬직한 일꾼이며, 내가 늘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성령께서 여러분의 삶을 얼마나 속속들이 사랑으로 물들게 하셨는지 우리에게 알려 준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소식을 들은 날부터 우리는 여러분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분의 뜻에 맞는 지혜로운 마음과 영을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을 여러분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주님의 과수원에서 주님께서 자랑스러워하실 정도로 열심히 일하고, 주님을 위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알면 알수록,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더욱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일을 끝까지 해낼 수 있는 힘-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마지못해 하는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그 영광스러운 힘-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는 힘, 기쁨이 넘쳐나는 힘, 우리를 강하게 하셔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두신 온갖 밝고 아름다운 일에 참여하게 하시는 아버지께 감사드리는 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막다른 길과 어두운 소굴에서 구출하셔서, 그분이 몹시 아끼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그 아들은 수렁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반복해서 지을 수밖에 없던 죄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주셨습니다(유진 피터슨 <메시지> 556-557).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위해를 위해 꾸준히 기도했음을 알린다(9절). 왜냐하면 예수를 믿고 죄에서 구원받는 길은 (값없이 얻은 길이면서) 좁은 길이기 때문이다. 뭘 그렇게 견디고 오래 참아야했을까? 예수는 제자들에게 고난 받을 것을 미리 알려줬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 16: 1) 이 길, 성령의 도움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이다.
골로새 교회는 철학과 헛된 속임수 곧,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라 하라는 거짓 가르침 때문에 내부적인 혼란을 겪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골 2: 16),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골 2: 18 – 19)
정확히 어떤 문제점을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신비주의 유대교의 형태와 이방 종교의 혼합 양상을 추측해 볼 수 있다(독일 성서 공회 해설 참조). 어쨌든 골로새서 전체에서 바울이 진정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인간을 노예화시키는 세력과 폭력의 권세를 깨뜨리신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부활의 능력에서 나오는 자유로운 삶 속에 자기 사람들을 세우셨다고 전한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들은 어떠한 종류의 권력에도 굴복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혹 육체는 억압할 수 있다하여도 안으로부터 나오는 부활의 능력은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6) 성령께서 삶을 속속들이 사랑으로 물들여가는 여정이다(8). 성령이 함께 하시는 이 과정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가며(9),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는 과정(10)과 같다.
아무도 멈출 수 없고, 아무도 이 과정을 억압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친히 억압과 착취에서 건져내시고 사랑하는 아들 예수의 나라로 옮기셨기 때문이다(13). 이로써 우리는 예수 안에서 죄 사함을 받았다(14).
5.
복음서 본문은 누가복음 10 : 25 - 37절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어느 한 면만을 볼 때가 잦다. 두려움을 갖는 것은 자유와 반대된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협박이 아니다. 그러나 서슬이 시퍼럴 때가 있다. 아모스를 통해 하시는 예언을 보면 요만큼의 타협도 없다. 그래서 규정할 수 없다.
악은 늘 선을 공격한다. 결국 악은 선을 죽이고 만다. 그러나 선을 죽지 않는다. 선이 다시 살아서 악을 구원해주는 것이 선의 역사다. 이것이 선의 운명이다. 어쩔 수 없는 선의 운명을 지금 예수는 걸어가고 있다. 예수의 마음속은 ‘선은 절대 죽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있다. 선은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선은 죽기는 죽지만, 악에 맞아 죽지만, 선은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는 것이다. 이것이 정의다. 몸은 죽는다. 그러나 마음은 죽지 않는다. 마음은 죽는 법이 없다. 예수의 마음은 아버지를 향하고 아버지와 같이 있다(김흥호 <신의 아들 예수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 339-340>, 요 14:10 –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그래서 예수는 자신의 생애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었다).
율법 교사가 예수를 시험할 생각으로 질문한다.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고,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 물으셨다. 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예수께서 옳다! 그대로 행하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말했다. 이번에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묻는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강도 만난 사람을 제사장과 레위인은 피해갔고, 사마리아 사람은 정성껏 돌보았다. 그리고 예수의 질문.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사마리아인이라고 말 못하고,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사마리아인은 구원 받아야 할 사람에 속하지 않았을 것이다. 율법과 전통이 선을 긋고 담을 쌓았다. 그런데 예수는 영생과 사마리아 사람을 한데 엮으면서 이웃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번역하면서 생긴 특수한 표현일 수 있겠지만 나는 예수가 율법교사에게 한 질문 중에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 이 문장에 자꾸 눈길이 간다. 나는 성경을 어떻게 읽는가? 나는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나는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율법교사에게 물은 예수의 질문이 나에게 하는 질문 같다. 진리는 암기할 명제가 아니다. 오히려 서사에 가깝다. 너는 어떻게 그리느냐? 너는 어떻게 표현하느냐? 네 생각은 어떠냐? 오히려 물으신다.
이러 저러하다 대답을 했는데 말과 삶이 분리 됐다. 단순화 할 수 없을 때까지 단순화했는데 그 명제가 삶과 동떨어졌다. 성경에서 구원이란 주제를 읽어 가장 단순한 문장으로 만들었는데 ‘혼을 다한 하나님 사랑과 내 몸 같이 이웃 사랑’이다. 그런데 예수는 ‘네 말이 옳도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말한 대로 실천해라’ 하신다. 실천이 분리된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 행함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인 것처럼.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 배웠으면 예수를 믿는 게 뭔지 삶으로 질문하고 증명해야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옳다고 인정받으니까 신이 났다. 그래서 한 술 더 뜬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한 술 더 떴다가 체했다. 좀 더 진실했다면 진실한 태도가 전달됐을 텐데 들떴다. 그래도 우리는 율법교사가 한 술 더 뜨는 바람에 좋은 가르침을 얻었다. 율법교사는 한 번 더 질문해서 심판대 앞에 섰다. 우리도 함께 서야 한다. 성찰해야 한다. 말씀 앞에 자신의 내면을 비춰봐야 한다.
말로는 모든 사람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지금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소홀하지 않았는지, 사람은 모두 존귀하다고 하면서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을 돌보는 일은 하찮은 일로 생각하지 않았는지, 먼 나라 분쟁에는 날카로운 관점을 가지면서 정작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갈등은 편협한 태도로 대하지는 않았는지….
신앙의 성숙은 어쩌면 이웃의 경계를 확장시켜 나가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온 인류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쩌면 콤플렉스가 아닌지. 눈앞에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인류애는 망상이다. 구원에서 도망치는 자신을 봐야한다. 내가 누구를 이웃으로 대하는지 스스로가 볼 수 있다면 내가 타자에게 어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보이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6.
정리가 안 돼서 글이 깁니다. 아무튼 저는 일주일 동안 네 본문 보면서 이런 묵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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