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성령강림 후 제6주 (한정훈) 본문

성서일과에 따른 설교준비노트/year C(다)

성령강림 후 제6주 (한정훈)

한, 정훈 2013. 9. 17. 16:37

1.

네 본문을 한 맥락으로 묶을 열쇠말이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나오질 않는다. 이럴 때가 힘들다. 덕분에 일주일 내내 더 많이 읽고, 생각했다. 마감(?)까지 켁켁 대다가 얻은 단어가 <거절>이다. 제목은 <거절 앞에서>로 할 생각이다.


2.

구약 본문은 열왕기하 2 : 1 2, 6 - 14이다. 소주제는 <바람의 거절>이다. 엘리야는 엘리사의 청을 거절하지 않는다. 엘리사가 뒤를 밟는 까닭에 거절하지 못한 것인 지도 모르겠다. 세 번이나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말한 엘리사에게 엘리야는 믿음직스러운 아버지와 다름없다. 결국 하나님이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정말??


욕망은 무엇을 간절하게 바라고 원하는 것. 또는 그 마음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것은 욕망의 크기나 진정성에 달려 있지 않다. 간절히 바란다고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하지만 응답을 거절로 받을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누구나 욕망이 거절 받을 때가 있다.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도 소중하지만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횟수의 문제가 아니다. 거절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과도한 자기연민이나 자괴감에 빠질 수 있다.

 

엘리사에게 엘리야는 아버지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지키는 강력한 군대라고 생각했다. 철석 같이 믿었다. 헤어져야 할 때를 직감한 엘리야는 이별을 알리지만 엘리사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니라고 한다. 함께 있겠다고 한다. 세 번이나 반복한다.

 

갑절의 능력을 달라는 부탁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봤다. 도저히 가망이 없는 것을 부탁함으로써 자신에게 얼마나 엘리야가 필요한지를 더 강하게 표현한 것은 아닐까? 강한 부정이 강한 긍정인 것처럼 말이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없는 자신과 이스라엘의 모습을 낙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엘리야를 깊이 의지했다. 헤어지기 싫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이 갈라놓으신다. 엘리야는 이제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여러 차례 말을 했어도 엘리사에게는 갑작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부르짖는다. 그렇지만 엘리야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고통스러워한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겉옷을 주워가지고 와서 그를 따라하며 엘리야의 하나님을 찾는다. 간절한 마음이 틀림없다. 그러자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엘리사는 여러 차례 현실로 다가온 이별을 거절하고, 부인한다. 그러다 결국 하나님이 그 둘을 갈라놓았다. 고통스러워하다가 엘리야의 흔적을 손에 들고 와서 그를 회상한다. 소극적인 슬픔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려는 적극적인 태도로 보인다. 하나님은 그와 함께 엘리야 이후의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3.

시편 본문은 시편 77 : 1 - 2, 11 - 20이다. 소주제는 <절망, 기억의 부재>이다. 사람의 인생에는 맑은 날, 밝은 날만 있지 않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전도서 3: 1). 따라서 삶의 리듬을 발견하고, 무섭게 찾아오는 절망을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 어떻게 절망에 압도되지 않고 마침내 희망을 붙잡을 수 있는가? 인간은 어디서 희망을 발견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해방을 맛본 자는 절망을 거절 할 수 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절망이 아니라 절망을 이길 기억의 부재이다.


사람이 어떻게 힘든 날을 이겨낼 수 있을까? 아니, 인간은 왜 절망을 이기려고 하고, 또 왜 그래야만 한단 말인가? 신을 믿는 사람들은 절망에 압도당할 수 없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브리서 10: 39)

 

인생에는 때가 있어 절망이 찾아올 때가 반드시 있다. 어떻게 이 절망을 이겨낼 것인가? 무엇으로 이겨낼 것인가? 어디서 절망을 거절할 희망을 발견할 것인가? 인생을 적당한 태도로 사는 자는 망하고 만다. 시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성경은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한다. 상상력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시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절망을 거절할 단순한 믿음은 미래에 대한 낙관이 아니라 기억의 확인에서 얻을 수 있다. 새로운 것을 상상하는 능력이 아니라 경험한 것을 잊지 않는 마음과 가깝다. 받을 것을 확신하는 마음이 아니라 받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온다.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뒤돌아볼 때 거기 있는 오늘이다. 푸리족은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한 단어로 말한다. 어제를 뜻할 때는 뒤쪽을 가리키고, 내일을 뜻할 때는 앞쪽을, 도 지금 지나가는 날을 뜻할 대는 머리 위를 가리는 것으로 뜻의 차이를 나타낸다.”(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157) 파편화된 시간에서는 생명력을 얻을 수 없다.

 

시인은 우직하게 과거를 회상한다. 기억을 더듬는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 아니라 하신 일을 철저히 되새긴다. 하나님의 해방을 맛본 자는 결코 절망에 압도되지 않는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절망이 아니라 절망을 이길 기억이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기억의 부재야 말로 인간을 헤어날 수 없는 절망에 빠뜨리게 한다.


(때론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서 기억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4.

신약 본문은 갈라디아서 5 : 1, 13 - 25이다. 소주제는 <기회의 거절>이다. 자유는 모든 기회의 가능성을 뜻하지 않는다. 자유는 종의 멍에를 거절하는 것이다. 종이 되지 말자는 결연한 의지와 태도가 자유이다.


사랑이 아닌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는 것이 자유를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 붙잡을 삶의 태도이다. 혹 우리의 육체를 누가 억지로 지배한다할지라도 결코 지배당하지 않는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안으로부터 영혼을 해방시키신다. 어떠한 외적인 억압에도 불구하고, 또 감정적인 슬픔이나 고통에도 마음은 자유를 유지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억압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영혼의 자유는 모든 억압을 이기는 힘이 돼야 한다. 모든 억압은 억압을 멈추고, 영혼의 자유를 반영해야 한다.


따라서 사랑이 아닌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는 것이 자유를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 붙잡을 삶의 태도이다. 특별히 돈이나 권력에 비굴해 질 수 없다. 움츠러들지 말자! 두려워하지 말자!


5.

복음서 본문은 누가복음 9 : 51 - 62절이다. 소주제는  <예수의 거절>이다. 예수를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 예수의 거절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떤 고대 사본에는 55절 끝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고 한다. '이르시되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노라 하시고'(독일 성서 공회 해설 참조)


거절 받아 거칠어지는 길이 아니다. 거절 받아도 생명을 구원하는 길을 걷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거절에 익숙해지지 않고는 걸을 수 없는 길이 예수의 길이 아닌가 생각해보니 마음이 무겁다. 자신이 없다.


6.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죽음과 가난, 약함이 생명과 부요함 그리고 강함이 되는 것처럼 거절은 단절을 뜻하는 물리침이 아니다. 성령 안에서, 정욕과 절망과 타협을 물리치는 연결, 접속의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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