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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의 깊이

한, 정훈 2014. 4. 1. 14:10

나는 자주 서툴고, 조급해서, 낙심을 자주한다. 잠을 설칠 만큼 예민하지는 않지만, 감수성이 풍부해서 외부자극에 민감하다. 자주 그 자극을 앓는다. 그래서인지 실패의 기억이 성공의 기억보다 훨씬 많다. 살다 보면, 뜻밖의 선물을 받을 때가 있고, 그럼 나는 늘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이걸 누려도 되나?"

실패냐, 성공이냐로 인생을 나눌 수 없는 까닭은, 나를 질문 앞에 세우는 은총으로 내가 어디 서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는 까닭이다. 무엇을 선물로 여기고 사는지에 따라 내가 어디에 뜻을 두고 사는 사람인지 드러난다고 믿는다. 요 며칠은 개나리로 온 봄이 선물이었고, 맑은 밤 하늘과 선명한 달이 선물이었다.

또 마이크를 받고, 아내 등에 기대어 잠시 울었고,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음에, 또 질문 앞에 선다. 낯설다, 이 모든 게. 하지만 더 낯선 것은 이웃에 비친 내 모습이다. 믿음을 주는 만큼 부담을 주고, 깊어진만큼 하찮아졌다. 이웃이라는 거울이 내 민낯을 비출 때마다 주춤거리고, 휘청거린다.

사람 대하는 기술이 아예 없지 않지만, 기술로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관계는 늘 어렵다. 그러나 변명 없이 살아야지. 변명할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닐뿐더러 변명만큼 자신을 하찮게 만드는 게 없다고 생각한다. 해석의 깊이가 작품의 깊이는 아니다. 독자의 몫이 남아 있을 때 작가의 깊이도 메워지지 않는다.

독자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해석이 작품과 작가를 들어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는 스스로의 깊이를 벗으로 삼을 때 존엄하다. 오해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깊어지는 길이다. 신은 자신을 제대로 해석하지 않는 사람을 일일이 찾아다니지 않는다. 해석의 깊이는 작품의 깊이가 아니라 해석자의 깊이이며, 또한 권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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