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생각과 말 본문
어느 날 아침, 내가 같은 주제와 같은 논지로 두 편의 에세이를 영어와 중국어로 각각 쓴다면 전혀 다른 두 편의 에세이가 나올 것이다. 서로 다른 이미지와 암시와 연상을 따르는 두 가지 생각의 흐름은 글 쓰는 이를 자동적으로 다른 길로 이끌기 때문이다. "사람은 생각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기 때문에, 가지고 놀 단어가 있기 때문에 생각한다. 생각은 말을 가지고 노는 과정일 뿐이다."
어떤 이가 다른 언어를 구사하면 그의 사상이 다른 옷과 다른 피부색을 띠게 된다. 언어가 달라지면 같은 대상을 지칭하는 단어의 음색이 바뀌고 다른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중국어를 공부하면서 중국인처럼 생각하기 시작했고, 중국인으로 생각하면서 어떤 진리와 이미지는 거의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린위탕 <이교도에서 기독교인으로> 78.
그러니까 교회에서 쓰는 말을 바꿔야 한다. 교회가 쓰는 말이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살아있는 관계가 지닌 역동을 막고 결국, 진실한 관계를 방해한다. 말을 바꾸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내가 말하는 말 바꾸는 노력은 번역의 관점에서 하는 말이다.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할 단어의 사용은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교회가 지금 쓰는 말의 의미가 새로워질 것이다
예를 들어, 전화를 받으면서 "할렐루야~" 이러는 데, 이건 당장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목사를 가리키는 "주의 종"이라는 말도 최대한 쓰지 말아야 한다. 그냥 목사라 하면 된다. "하나님이 하셨다"도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응답"이라는 말도 정말 써야 할 때만 써야 한다. 그 외에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뜻이다" "은혜롭다" "덕을 끼친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이런 말이 있다.
이 말들이 어떤 진실도 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거짓을 숨기는 데도 유용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한다. 글(책)은 생각하려고 읽는 거지, 생각을 멈추려고 읽는 게 아니라는 황현산 선생님의 말을 기억하면서.
이 책 재밌다. 그리고 이 사진 참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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