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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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있으라

한, 정훈 2014. 4. 18. 16:29

나는 특별히 착한 사람도 아니고, 그러려고 애쓰던 시절의 나와도 안녕한지 좀 됐다. 또 입만 열면 우정 우정 떠드는 사람이 우정이 필요한 때 가장 먼저 우정을 버린다는 사실도 경험으로 안다. 그러나 저 바다에 거꾸로 처박혀 있는 배와 그 캄캄한 세월의 어둠 속에서 사투를 벌였을 생의 의지와 생사 확인이라도 해야 마음껏 이름이라도 부를 부모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사실 이 정도까지 힘든 건 처음이다. 아마도 우리 집에 세 아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애들이 밤에 기침만 심하게 해도 이런저런 걱정을 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마음을 졸이는 저 부모의 심정은... 아니다. 이런 말은 상투적이 될 수 있고, 또 지키지도 못할 말이다. 어쨌든 남의 일이라고 제쳐놓는 게 이번에는 좀 안 된다.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다. 자주 생각이 나고, 또 가끔 눈물이 난다.


참된 기독교인은 거룩함과 기독교의 모든 사랑할 만한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본성에 맞기" 때문에 기독교인인 사람이다. (...) 그것이 참된 기독교인이다. 음험한 기독교인은 지옥불이 무서워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자다. 비열한 기독교인은 천국에 가서 천사들과 차도 마시고 찬양도 같이 부르고 싶은 마음에 기독교인이 되고 싶어 하는 자다. 그런데 진짜 예수회 사람은 자신은 천국도, 천사도, 지옥불도 그다지 믿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믿기를, 자기 유익을 위해 그들이 기독교인이 되기를 바라는 자다! 그것이 예수회 사람이다.


린위탕의 말은 아니고, 그가 좋아한 구훙밍의 말이다(린위탕 <이교도에서 기독교인으로> 72).


나는 가능하면 내가 지나온 삶을 모독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혼돈의 끝에서 질서의 빛을 만났다. 질서는 처음으로 내 삶을 정연하게 했고, 무엇보다 걸레 같은 내 인생을 눈물로 빨 수 있는 집중의 시간과 장소를 허락했다. 나는 이 시기에 가만두었으면 어디까지 더럽혀졌을지 모를 내 인생에 처음으로 브레이크를 달았다. 브레이크를 쓰는 게 처음이라 몸이 앞쪽으로 쏠리는 그 서툰 짓을 자주 했고, 어느 때는 제동 거리가 너무 길어서 앞의 차의 뒤꽁무니를 들이받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질서를 사랑했다.

나는 어쩌다 질서의 끝에 가봤다. 거기서 나는 질서 밖에 있는 "나를 사랑한 또 내가 사랑한" 그 질서에게 버림받은 사람들을 봤다. 낯선 광경이었다. 그동안 나는 질서의 바깥은 무질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거기에는 또 다른 질서가 있고, 저들만의 소중한 이유가 있다. 질서는 교회이기도 하고, 근본주의이기도 하다. 무질서는 교회 밖이기도 하고, 자유의 땅이라 부를 만한 무엇이기도 하다.


질서 안에는 실은 질서를 사랑하지 않는, 질서가 추구하는 바에 무관심한 사람이 많다. 그들은 정직하게 이야기하면 질서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한편 질서가 버린 사람 중에는 저 자신도 질서에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여러 만남 중에서 내 정신의 깊은 곳까지 찾아와 나를 뒤흔든 것은 자유의 땅을 사는, 자유의 땅을 자유의 땅 되게 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그들은 죄책감이나 자기연민과 결별하여, 질서를 사랑하면서 자발적 복종 이외의 속박에 매이지 않는다.

자유에 땅에는 종이 아니라 주인들이 산다. 나는 자유의 땅도 땅이지만 자유와 그 땅에 자유를 불어넣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됐다.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나를 이제껏 돌봐주고, 사랑해준 사람들이 여전히 질서 안에 있다. 그래서 나는 질서를 모독할 수가 없다. 모독하는 것으로 자유가 들어 올려지지 않을뿐더러,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준 사람들의 삶을 해체하는 것은 나랑 맞지 않는다고 생각된 까닭이다. 나는 질서 안에 있는 사람의 정신에서 천국, 천사, 지옥불을 도려내고 싶은 마음을 접었다. 이야기했듯이 그건 내가 뜻하는 바도 아니고, 내 본성에도 맞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질서 안에 있는 이것만은 반드시 해체해야 한다. "가만히 있으라" "튀지 마라" "다 그런 거다" "시키는 대로 해라" "너만 잘났냐?" 질서 안에서 즐겨 쓰는 이런 말은 결코 질서를 돋우는 말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이런 말이 질서와 질서가 사랑하는 것들을 모독한다. 질서는 억압으로 세워지지 않는다. 주인 의식을 거세하는 일은 질서를 세우는 기둥이 될 수 없다. 종된 의식으로는 질서가 추구하는 바를 떠받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는 자신의 재능을 열심히 계발하라는 뜻이 아니다. 제발!! (타국을 가게 된 주인이 종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었는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가 주인에게 되돌려 줬다) 눈에 보이는 질서에 눈이 멀어 정작 질서가 추구하고 사랑하는 것에는 눈이 먼 사람을 흔들어 깨우는 본문이다. 상상력의 억압과 눈치 보는 삶, 책임지지 않으려는 종된 삶은 비참한 삶이라고 타국에서 돌아온 주인의 입을 빌려 말한다.


"군자는 옳은 것을 알지만, 소인은 무엇이 이익이 될지를 안다."


이것 역시 린위탕의 말이 아니라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린위탕 <이교도에서 기독교인으로> 106).

부활주일이 이틀 뒤다. 부활은 기쁜 소식이고, 기독교인에게 부활주일은 기쁜 날이 되어야 하는 게 맞다. 그러나 이번 부활주일은 좀 덜 기쁜 마음으로 보내면 좋겠다. 교회가 부활주일에 맞춰 "워십 경연대회"를 준비했다. 청년들도 "아따 참말이여" 하기로 했다. 나는 소개만 했다. 상당히 밝고, 재밌는 노래다. 아마 다른 부서나 팀도 마찬가지일 거다. 다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밝고, 재밌는 노래를 골랐을 것이다.


여객선 사고가 나고 이튿날 아침 청년 회장에게 문자가 왔다. 곡을 바꿨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사고 소식에 마음이 너무 무겁고 안타까운데, 신 나게 "아따 참말이여"를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곡을 바꿀 게 아니라 이번 행사를 미뤘으면 좋겠다고 했고, 출근해서 교회에 그렇게 건의했다. 아직 결정 안 됐고, 기다리고 있다. 나는 우리 교회만이 아니라 한국에 모든 교회가 이번 부활주일은 좀 덜 기쁜 마음으로 보내면 좋겠다.

교회에 건의할 때, 세 가지 이유를 댔다. 첫째, 부활주일이 우리에게 기쁜 날이지만, 온 나라가 슬퍼하는데, 교회도 함께 애도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둘째, 정서에 맞지 않는다. 한 주 내내 저 풀리지 않는 숙제에 상처를 받았는데, 교회에 와서 마음껏 웃게 된다면 그것만큼 부자연스러운 일이 어디 있을까. 셋째, 교회 밖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여러 행사가 취소되거나 연기되고 있는데, 소통이 막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내가 생명으로 만난 기독교는 생명을 사랑하고, 이웃사랑을 추구하고, 자기 비움을 가르치는 종교이다. 이번 부활주일을 덜 기쁘게 보내는 게 내가 만난 진실에 성실할 수 있는 태도라고 믿는다.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을 오롯이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큰 슬픔을 겪는 사람을 의식하고 조심하는 것은 질서를 사랑해서 입만 열면 늘 질서 질서 하는 사람과 잘 어울리는 태도라고 믿는다.

나 역시 이번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 가장 잘 드러내는 문장은 "가만 있으라"라고 생각한다. "가만 있으라"는 폭력이 내면화된 질서의 세월을 상징한다. 그 뒤틀린 질서의 세월은 이 땅에 가득한 온갖 부조리와 함께 깊은 바다에 잠겨있다. 근데 이 역겨운 세월이 부모의 마음에 살던 수없이 많은 아이를 물귀신처럼 붙잡고 들어갔다. 이보다 더한 부조리가 어디 있을까?


언제나 가장 약한 곳이 피해를 본다. 몸도 그렇고, 환경도 그렇고, 심지어 세월도 그렇다. 더군다나 이 부조리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종된 의식에 의해 호위 되고, 손익을 계산하는 데 빠른 소인과 소인을 게걸스럽게 원하는 부조리의 결탁으로 구조 작업은 발목이 잡혀 있다. 이제 조류와 시계 어쩌니 하는 말은 더 듣고 싶지 않다. 누군가 또 "가만 있으라" 말을 했겠지.

가만있지 못하겠다. 누군가는 저 참사 현장에서 여전히 "가만 있으라" "기다려라" "내가 알아서 한다"를 달고 사는 어떤 세력과 싸워야 한다. 그 세력은 주인이 아니다. 언제나 종 아닌 것은 될 수 없어 종을 자처한다. 나는 이제껏 내가 지나온 세월을 모독하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이제 더는 가만있을 수가 없다. 가만있을 수 없는 세월이 온다.


우선 한국교회여, 이번 부활주일은, 제발 "가만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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