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네 침상을 치우라 본문
"네 침상을 치우라."고 번역했다. 왜냐하면 여기 이 '침상'은, 그 병자를 오랫동안 누워있게 만든 '병상'(병상)이기 때문이다. 율법에 의해 단죄되어 '죄인'으로 살아야했던 삶의 자리가 이 '침상'이고 보면, 네 침상을 치우라."는 이 말씀은 더 이상 율법에 얽매여 죄인으로 살지 말라는 파격적인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더구나 명령형으로 쓰인 '페리파테오'라는 동사는, '두루 다니다, 걷다'라는 뜻이지만, '행하다, 살다'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 한자의 '다닐 행(행)'처럼, '살아간다'는 뜻으로 읽어도 무방한 말이다. 그러니까 "네 침상을 치우라."는 말에 연이어 "걸어라"라고 한 것은, 더 이상 율법에 얽매이지 말고 행하고 싶은 대로 '행하며 살아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다. 너를 죄인으로 만든 율법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가다 보면 건강해지지 않겠느냐는 낙관적인 처방이다.
나는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예배가, '방방 뜨는'(?) 예배로 변해가는 것을 내심 우려한다. 특히 젊은이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온갖 악기를 동원하여 춤추고 노래하며 예배 분위기를 고조시키려고 애쓰는 것을 볼 때마다, 베데스다 연못의 고인 물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서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젓는 것 같아서 안쓰럽다.
강일상 <기독교사상> 설교자를 위한 성서읽기: "네가 원하느냐?" 115.
지난달에 '설교자를 위한 성서읽기'에 강일상 목사님 글이 빠져서 당황했다. 혹시 연재가 끝났나 하는 생각에 출판사에 전화해볼까도 고민했었다. 다행히 이번 달에는 반가운 글이 실렸다.
종교개혁 의지도 꼭 필요하지만, 아울러 우리를 죄인으로 만든 율법에서 해방하는 낙관적 처방이 꼭 필요한 시절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니, 실은 모든 시대마다 이 해방이 필요했다. 낡은 시대를 갈아엎을, 때가 꽉 찬 시절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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