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입은 분노도 본문

종교적인 너무도 종교적인

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입은 분노도

한, 정훈 2014. 10. 28. 14:08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님 가게 앞 노점 리어커에서 처음 (해적판) 가요 테이프를 샀다. 지금은 초등학생도 대중문화가 익숙하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2,500원 정도였을 거다. 혹시 부모님이나 아는 어른에게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며 겨우 숨을 쉬면서 돈을 건넸다. 그렇게 처음 산 가요 테이프가 바로 신해철 1집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이다.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난 포기하지 않아요

그대도 우리들의 만남엔 후횐 없겠죠

어렵고 또 험한 길을 걸어도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외워서 적었는데 가사가 맞는지 모르겠다. 사실 이 앨범에서 가장 좋아한 노래는 <안녕>이었다. 친구 누나한테 부탁해서 영어 랩을 한글 발음으로 적어달라고 했다. 이 영어 랩 역시 지금도 외운다. 이때 산 가요 테이프가 해적판이어서 덤으로 <무한궤도> 노래도 몇 곡 실려 있었다. 유명한 <그대에게>도 좋았지만, 나는 <여름이야기>가 정말 좋았다. 첫사랑을 우연히 만난 남자가 소중한 기억을 지키고 싶어 그냥 돌아섰다는 내용이다.


너의 손을 잡고

말 하고 싶어도

소중한 기억 깨어질까봐

그냥 다시 돌아서

잊어버렸던 첫사랑의 설레임과 떨려오는 기쁨에 다시 눈을 감으면

너는 다시 내곁에 예쁜 추억으로 날아들어

내 어깨 위에 잠드네


내가 중2병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책임이 신해철(형님)에게도 있다.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2집 <나에게 쓰는 편지>이다. 



난 잃어버린 나를 만나고 싶어

모두 잠든 후에 나에게 편지를 쓰네

내 마음 깊이 초라한 모습으로

힘없이 서있는 나를 안아주고 싶어


로 시작하는 노래에 랩 부분이 있는데, 가사가 이렇다.


이제 나의 친구들은

더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흐의 불꽃 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 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엔 더이상 도움될 것이 없다 말한다

전망 좋은 직장과

가정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 구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넘어가는 시기에 매일 이런 노래를 들었다. 그러니 중2병에 안 걸릴 수가 없다. 그러나 밉지 않다. 대중문화가 한 사람의 철학과 가치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모르겠지만, 신해철의 감성과 음악성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철학과 인생에 관한 질문은 내 학창시절에 기억으로 깊이 새겨져 있다.


<절망에 관하여>, <아주 가끔은>, <70년대에 바침> 그리고 넥스트로 넘어가면서 <도시인>, <날아라 병아리>, <인형의 기사>, <Here I Stand For You>를 지나고 신해철과 멀어졌지만- 2집 이후의 넥스트 신해철은 나랑 잘 맞지 않았지만- <나에게 쓰는 편지> 식의 물음과 성찰은 나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판단한다.


한 연예인의 죽음이라고 하기에는 어쩐지 빚진 게 많은 가까운 사람과의 이별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흐를 불꽃 같은 삶으로 니체를 상처 입은 분노로 수식하면서 동화 속 주인공처럼 잊힐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눈도 귀도 지금보다 더 어둡던 학창시절 나에게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고 말해주었고, 오늘 다시 듣는 <나에게 쓰는 편지>는 "넌 아직도 너의 길을 두려워하고 있니?"라고 묻는다.


슬프다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쓸쓸한 마음에 몇 마디 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나에게 신해철이 의미 있던 만큼, 우리 가요계에도 마찬가지이다. 신해철을 대신할 사람이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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