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김사인 <고비사막 어머니> 본문

시로 쓴 편지

김사인 <고비사막 어머니>

한, 정훈 2015. 2. 12. 17:48



1
잘 가셨을라나.
길 떠나신 지 벌써 다섯해
고개 하나 넘으며 뼈 한자루 내주고
물 하나 건너면서 살 한줌 덜어주며
이제 그곳에 닿으셨을라나.

흙으로 물로 바람으로
살과 뼈 터럭들 제 갈 길로 보내고
당신만 남아 잠시 호젓하다가
아니, 아무것도 아닌 이게 뭐지, 화들짝 놀라시다가
그 순간 남은 공부 다 이루어
높이 오른 연기처럼 문득 흩어지셨을까.

2
어디 가 계신가요 어머니.
이렇게 오래 전화도 안 받으시고
오늘 저녁에는 돌아오세요.
콩국수를 만들어주세요.
수박도 좀 잘라주시고
제 몫으로 아껴둔 머루술도 한잔 걸러주세요.
술 잘하는 아들 대견해하며, 당신도 곁에 앉아 찻숟갈로 맛보세요 나는 이렇게만 해도 취한다 하시며.
어머니, 머리도 좀 만져봐주세요 손도 좀 잡아주세요 그래, 너희는 살기 안 힘드니, 물어봐도 주세요.
너 피곤한데 내가 자꾸 붙잡고 얘기가 길다, 멋쩍게 웃으시며, 그래도 담배 하나 더 태우고 건너가세요 어머니.

3
혹시 머나먼 고비사막으로 가셨나요 어머니는.
낙타들과 놀고 계시나요.
꾀죄죄한 양들을 돌보시나요.
빨갛게 그들은 그곳 아낙들의 착한 수다 들어주고 계시나요.

그럼 저는 어디로 흘러가야 할까요.
꼬 당신을 다시 만나자는 건 아니지만
달아나는 돌들과 자꾸만 뒤로 숨는 풀들과
봉분 위로 부는 바람 하나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어머니 가시고도 밥솥의 밥은 따뜻하고
못난 아들 형과 나는 있고
아이들은 눈싸움을 조르고
어머니 가시고도 꽃 피고 잎 지고
꺼끄러운 수염은 자라고
술도 있고요.
그곳은 그곳대로
모쪼록 그러하시길.

●●

할머니 생각, 할아버지 생각.
그리운 내 모든 상실과의 연결.
가고 남은-여전한 것들이 눈을 깜빡이며 말을 기다린다.

"너희는 살기 안 힘드니"

이 여전한 것들이, 이 말에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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