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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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 예찬

한, 정훈 2015. 3. 25. 12:07

자아의 유일성을 가꾸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덧셈법과 뺄셈법이다. 아녜스는 자신의 순수한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자아에서 외적인 것과 빌려온 것을 모두 추려 냈다. (이 경우 연이은 뺄셈 때문에 자아가 0이 되어 버릴 위험이 있다.) 로라의 방법은 정확히 그 반대다. 자신의 자아를 좀 더 잘 보이게 하고, 좀 더 파악하기 쉽게 하고, 좀 더 두텁게 하기 위해서, 그녀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덧붙여 그것에 자아를 동화했다. (이 경우 덧붙은 속성들 때문에, 자아의 본질을 상실해 버릴 위험이 있다.)

밀란 쿤데라 <불멸>


마음에 드는 사진입니다. 막내가 없을 때는 늦게 귀가하면, 현빈이 유빈이 둘 다 재우는 게 우리 부부의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서빈이 낳은 뒤로는 둘 중에 한 녀석은 깨어있어야 좋습니다. 아니면 저렇게 제가 둘 다 들쳐 안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두 녀석 몸무게를 합치면 거의 40킬로가 되어서 주차장부터 안고 오는 게 힘이 부칩니다.


며칠 전 아내는 서빈이를 안고, 저는 저렇게 현빈이 유빈이를 안았습니다. 아내가 뒤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저는 요새 뒷모습이 좋습니다. 아마 황현산 선생님의 <밤이 선생이다>란 책을 본 이후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팀 아이텔이 그린 입을 다물고 있는 느낌의 그림을 좋아한 것도 그쯤일 겁니다. 원래 그림은 말을 않지만, 유독 팀 아이텔 작품은 음소거 한 것처럼 보입니다.

삶에 대해 모조리 말하고 싶은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요새는 삶을 다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일 수도 있습니다. 등 돌린 이의 어깨를 두드려서 얼굴을 보자고, 말을 감춘 이와 눈을 맞춰 마음을 꺼내라고 요청했습니다. 무언가 모르는 채로 남겨두는 것을 수치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계몽을 나와 남 모두에게 강요할 때가 잦았습니다.

갑자기 늙어버린 기분입니다. 하지만 슬프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삶의 무게를 더 할 뿐인 덧셈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읽히지 못한 책이 방 안에 널려있고, 감당하지 못할 진실이 수치와 체념으로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덧셈법만 알고, 뺄셈법은 잊고 살았습니다. 저는 설교를 해도 모조리 설명하려고 하는 (복음의 전도사가 아닌) 친절한 덧셈의 전도사였습니다. 요새 그런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삶의 짐을 더는 뺄셈인 덧셈법은 없을까 자주 생각합니다.

저 사진이 좋은 이유는 우선 날씬해 보여서입니다. 저 사진만 보면 누가 저를 187에 110킬로로 보겠는가 생각하면 흐뭇해집니다. 그런데 그보다도 힘겨워하는 제 얼굴은 가려지고, 두 아이를 거뜬히 들쳐 맨 듬직한 아빠 모습만 드러나는 것 같아 그게 마음에 듭니다. 제가 저 사진에서 뒤를 돌아봤다면, 모르긴 몰라도 코미디나 공포물에 가까웠을 겁니다.

뒷모습에는 생생한 현실이 담기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든든한-또 날씬하기까지 한- 엄연한 진실이 담겨있습니다. 앞모습을 보지 않고도 참을 수 있는, 상세히 듣지 않고도 헤아릴 수 있는, 통제하지 않고도 만족할 수 있는, 의식을 깨우지 않고도 해방일 수 있는, 단번에 알지 않아도 지속할 수 있는, 모른다고 해야 진짜 아는 것인, 그런 힘겨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정신 한가운데에 뒷모습에 대한 애정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합니다.

어쨌든 저는 이 사진이 좋고, 또 갑자기 늙어버렸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진 출처: http://www.mu-u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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