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성령강림후 제9주(C year) 하나님은 사람을 찾는다 본문

성서일과에 따른 설교준비노트/year C(다)

성령강림후 제9주(C year) 하나님은 사람을 찾는다

한, 정훈 2016. 7. 19. 23:19

He, Qi <Mary and Martha>


하나님은 사람을 찾는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바로 다음에 온다. 성경은 율법 교사가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게 된 배경에 저 자신을 긍정 받고-또는 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고 말하며, 이때 자신이란 자신의 행위일 것이다. 그동안 잘 살아왔다는 것을 예수의 입 즉, 권위를 통해 인정받기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그와 그가 속한 사회가 냉대하던 사마리아인을 들어 올림으로써 통념이 된 이웃의 개념이 허상이며 (율법 교사 자신이기도 한) 유대 사회의 종교적·도덕적 이데올로기가 드리운 그림자를 직면하기를 원했다. 이 이야기 다음에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가 온다.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는 흔히 한국교회에서 예배냐 봉사냐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비약하며, 종교성의 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 예수의 마지막 말이 마리아를 편드는 것으로 해석하여 바람직한 종교적 태도는 말씀-의 경청-을 최우선시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 42)


종교적 실천(참여)과 종교적 수행 또는 종교 행위 자체의 관계는 종교사가 오랫동안 문제로 다루어온 주제인데, 아직도 시원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다만 종교의 체험과 의식의 변환 -혹은 깨달음-인 회개(metanoia)를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종교 체험에 앞선 사회적 봉사와 참여는 종교 체험을 위한 도덕적 수행의 하나로 이기적인 봉사에서 벗어나게 도우며, 체험 후에 자신과 남에게 실수하지 않게 하는 도덕적 훈련의 의미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결론이 어찌 되었든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를 양자택일의 관점으로 읽으면, 체험에 앞선 종교적 실천이 도덕적 성숙을 오히려 방해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마르다가 손님 접대에 애를 쓰지 않았더라면 불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뭣이 중헌지 따지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읽어서는 더 의미 있는 해석을 얻을 수 없을 거로 생각한다.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의 해석을 위해 놓치지 말아야 할 두 가지 배경이 있다. 하나는 예수가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을 영광이냐 고난이냐 어느 한 가지로 한정 짓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다만 예수의 발걸음이 가볍지는 않았을 것이고, 마음 또한 전에 없이 진지했을 거로 상상할 수가 있다. 실제로 예루살렘 ‘행군’을 시작하며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제자의 몸(정신)에 얼마나 굳센 마음먹음이 있어야 하는지 가르쳤고, 제자들을 짝지어 실전에 투입하면서 특별한 격려와 지지를 보낸 일이 있다.


잊지 않아야 할 다른 하나는 마리아가 예수의 ‘발치’에 앉았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39). 한 여자가 선생의 발 가까이에 앉아 있다는 사실은, 그 자세와 개념으로 볼 때, 선생-학생 관계의 성립을 드러낸다. 여자를 학생으로 받는 일은 유대교 랍비에게는 맞지 않는 일이다(독일성서공회 해설 참조).


이 두 가지 배경을 함께 보면, 일하는 마르다와 공부하는 마리아로 나누어 일이냐 공부냐, 봉사냐 예배냐 나눌 일이 아니라 예루살렘 행군의 의미와 무게를 이해하는 제자인 마리아의 선택이 ‘듣기’라고 이해할 수가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봉사와 예배, 더 나아가 윤리와 종교, 실천과 기도의 서열의 시금석이 아닌 ‘때’의 문제로 풀어낼 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마르다와 그를 대하는 예수의 태도가 너무 많은 오해를 받았다고 믿는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40). 이 말을 할 때의 마르다가 어떤 말본새였는지 글을 통해 정확히 할 수는 없지만, 실은 더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예수에게 잘 전달되었다고 본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41). 마르다야 마르다야, 두 번 부르는 마음에는 애틋한 것이 있다.


하지만 참 인간 예수는 그의 고뇌와 삶의 무게를 들어줄 한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정성을 다하고도 부족하게 느낀 마르다의 대접도 고마운 일이지만, 지금 예수에게 가장 필요한 대접은 자신을 들어줄 사람이었다. 마침 오늘 구약 본문에 하나님의 심판으로써 ‘기근’이 나온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 아니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 앞에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온다고 앞서 말했다. 듣고 싶은 말을 기다리는 것은 ‘듣기’가 아니다. 아는 것을 말하기 위해 질문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오늘 신약 본문에서 바울은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고백한다(24). 아는 사람은 아는 이야기인데, 하나님은 사람을 찾는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다. 하나님도 마찬가지고 사람도 마찬가지인데,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위한 소비될 존재로서의 타자가 아니라 서로의 고난을 채워줄 빈 그릇인 타자를 찾는다. 마리아가 지금도 빛나는 까닭은 마르다의 불평을 귓등으로 듣고, 예수의 발치에 앉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가 하나님이 너무나 들어줄 사람이 필요할 때에 들었기 때문이다.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하나님은 사람을 찾는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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