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성령강림후 제10주(C year)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다 본문

성서일과에 따른 설교준비노트/year C(다)

성령강림후 제10주(C year)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다

한, 정훈 2016. 7. 24. 02:34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다

JESUS MAFA <The Insistent Friend, 1973>


사람이 영적 존재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 존재에서 자유롭게 되는 길은 유대교와 이방 전통에서 제시하는 종교적 규정을 준수하는 것밖에 없다는 가르침을 바울은 헛된 속임수라고 말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도 ‘갓톡’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속임수가 활개 친다. 처음에 갓톡을 알게 된 것은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얼마 뒤였다.

노란 리본 캠페인이 주술적인 의미가 담긴 행위라며, SNS 프로필에서 당장 내리자고 하는 글이었다. 이런저런 논리를 들어 결국 노란 리본은 종교 혼합주의고, 귀신을 부르는 행위이며, 악한 속임수라고 주장했다. 더 기가 막힌 말은 세월호 참사가 원수사탄이 일으킨 ‘묻지마 살인’이라는 내용이었다.

형이상학적으로 체계를 갖추는 것은 대중종교를 견고히 하는 소중한 과업이다. 교리가 온전할수록 대중성이 확보되고, 종교로 확보할 수 있는 안정이 도모된다. 그러나 제도적 종교가 대중성을 획득한다 할지라도 종교가 본질로 추구하는 지점에 도달하는 사람은 적을 수밖에 없다. 목표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많은 사람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종교가 희생을 요청하는 까닭이다.

갓톡이 거짓 속임수인 것은 어떤 희생도 요청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두려워하고, 혐오하고, 증오하라고 할 뿐이다. 자신의 SNS에서 사진을 내리고 올리는 일에 뭐 그리 대단한 희생이 요구되겠는가. 종교가 자기를 오롯이 희생할 수 있는, 또 그런 희생을 한 소위 영적인 엘리트의 전유물일 수는 없다. 그것만이 참된 종교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다. 어찌 보면 제도적 종교는 (넓은 길이라는 비판을 받더라도) 시민을 위한 적절한 폭의 길을 제시하면서, 사회의 안정을 도모하는 일에도 이바지해야 한다.

하지만 중심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기독교의 이상이 몸(정신)을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종교의 궁극적 가치는 희생에 있으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는 기독교의 이상은 희생을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란 리본과 나비에 대한 상징 해석과 노근리를 들먹인 그 지저분한 의도는 제쳐 두고라도, 갓톡은 대중성을 추구하는 한국 기독교가 어디서 실패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이며, 상징이다.

‘붉은 악마’가 한창일 때는, ‘화이트 엔젤’이라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이상한 이름을 만들었고, 이웃 나라의 자연재해를 이교도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면서 연민을 거두자고 충동질했다. 교회 일치 운동을 향한 조잡하고 생게망게한 조롱과 적대감, 이슬람과 가톨릭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조장하는 도청도설이 난무한다. 여기에 한국 기독교의 실패가 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골 2: 6, 11). 기독교인으로서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다.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자격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생명 안에서 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로 얻은 권한에 가깝다. 구원은 제 ‘손으로 하는 일’ 곧,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선물이기 때문이다.

호세아에게 내린 하나님의 첫 명령은 음란한 여자와 결혼해 음란한 자식을 낳는 일이었다(호 1: 2). 음란하다고 하는 것은 행실이 방탕한 여자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신전 창기를 가리킨다. 음란은 다산 종교의식의 예배이며, 그 자체로 이스라엘의 죄를 상징한다. 죄의 열매로 얻은 두 아이의 이름이 각각 ‘로루하마’(자비를 얻지 못함)와 ‘로암미’(아무것도 아님 –혹은 내 백성이 아님)이다. 하나님의 자비가 동이 났음을 나타낸다(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참조).

하지만 오늘 본문 마지막에 하나님은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10). 나는 성경의 이 비약을 좋아한다. 로마서 7장에서도 바울이 저 자신의 연약함을 말하다 갑자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하고 고백한다(롬 7: 25). 이 비약, 여기에 진실에 가깝게 인생을 묘사하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적확한 분석이나 비평이 아니라 논리를 뛰어넘어 한걸음에 중심으로 치고 들어오는 신뢰와 사랑, 받아들임과 감사가 기독교 신앙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실을 더 잘 설명한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갑자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깊은 심연의 허무가 한순간에 의미가 되는 이 가능성을 믿는-기다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요행을 바라고 감나무 아래서 입 벌리고 있는 것과 수주대토(守株待兔)식의 미련하고 막연한 기다림과는 다른 기다림이다. 질문이 없는 대답은 생명력이 없고, 추구하지 않고 얻은 것은 가치가 없다. 그래서 예수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고 가르쳤고(눅 11: 9) ,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라고 가르쳤다(10).

"만일 누가 너에게, 열심히 애썼지만 그분을 찾지 못했노라고 얘기하거든 그를 믿지 말아라. 만일 그가, 나는 애를 쓰지도 않았는데 그분을 찾았다고 말하거든 그를 믿지 말아라. 만일 그가, 나는 애를 썼더니 그분을 뵙게 되었노라고 말하거든 그 사람은 믿어도 된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사람을 찾는 하느님> 56). 신앙과 구원은 힘겨운 가능성이며, 오래 수고한 농부의 수확과 같은 것이라고 믿는다.

희생 없는 종교를 말하거나 반대로 노력의 산물에 가까운 구원을 이야기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인생을 잘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어쨌든 얼마나 다행인가, “구하더라도 너희에게 주지 않을 것이요 문을 두드려도 너희에게 열리지 않을 것이요 두드려도 소용없을 것”이라고 하지 않은 것이. 남은 것은 우리의 응답이다. 아멘.


댓글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