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성령강림후 제12주(C year) 어쩔 줄 모르는 사람 본문
Fildes, Luke, Sir <Widower, from 1875 until 1876>
나귀를 장에 팔러 가는 부자(父子)이야기가 있다. 처음에 부자가 걷고 나귀를 끌고 가자, 장사꾼들이 수군댄다. 힘든 데 타고 가지. 그래서 아들만 태운다. 노인들이 수군댄다. 고얀 놈. 그래서 아들이 내리고 아버지만 탄다. 아낙네들이 수군댄다. 가엾어라. 그래서 부자가 함께 탄다. 동네 아가씨들이 수군댄다. 인정머리 없기는. 보다 못한 어떤 사람이 충고한다. 둘이 나귀를 지고 가면 될 것 아니오. 그렇게 한다. 다리 위를 건너다 시퍼런 물을 보고 놀란 나귀가 휘청거린다. 어, 어 하다가 나귀가 물에 빠진다. 한동안 이 이야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도대체 어쩌라는 거지?
오늘 신약 본문은 ‘믿음장’으로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이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 8). 특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이 부분을 좋아한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에 “예”하고 대답을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할지 몰랐다는 이 말이 인생과 신앙을 잘 담아내는 글월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논쟁할 때에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요 8: 14) 하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는 사람이다. 나는 몰라도 예수는 안다는 사실을 알고, 반대로 예수가 아는 것을 우리는 모른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 영 모르는 것은 아니다. 거기가 어디인지 어떻게 가는지 설명할 적확한 언어가 없을지라도 내가 부르심을 따르는 여정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가 가는 곳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재하는 곳이라는 걸 안다. 이렇게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앎을 지속하는 어떤 확신을 기독교에서 믿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C.S.루이스의 책에서 본 거로 기억하는데, 낯선 어둠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은 저편에 누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소리 지른다. 구원은 낯선 곳에서 일어난다.
어쩔 줄 모른다는 것은 놀림 받을 일이나 수치스러워할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도인’ -혹은 도사(道士)-가 되는 게 아니다. 기꺼이 모르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며, 아는 체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르는 체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가스레인지가 작동하지 않아 다급한 마음에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더 놀라운 것은 기도한 후에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믿음이 가스레인지를 붙들고 기도하는 수준을 이상으로 삼지는 않지만, 안다는 사람들은 자주 이런 믿음을 비웃으면서 기독교 도사가 되고, 아는 체하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역설적이게도 도사가 된 그리스도인은 저 자신의 삶에 늘 도가 터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정작 구원이 낯선 곳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나그네로 산다는 것은 일부러 겉도는 것이 아니다. 나그네로 산다는 것은 완성하지 않는 것이며,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성을 그려 넣지(짓지) 않았다. 그가 약속의 땅에서 장막 생활을 했다는 말은 자신의 인생 풍경을 완성하지 않았다는 말과 같다(9). 성경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나는 속마음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을 아브라함을 떠올린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 예수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말했다(눅 12: 35).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고 말했다(눅 12: 36). 자신의 풍경을 완성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의 시간을 닫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갓난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10시에 자요, 11시에 자요 이렇게 말하지 못한다. 애가 잠들면 자는 거다. 자신의 시간을 닫지 못한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어떤 날은 이경(밤 아홉 시부터 열한 시 사이)이 되기도 하고, 삼경(밤 열한 시에서 새벽 한 시 사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38).
늘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을 유독 종교생활(행위)를 열심히 하라는 말로 읽을 때가 잦다. 하지만 오늘 구약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라고 하면서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다(사 1: 13). 흐트러진 종교생활을 가다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자신과 화해하는 일이다. 성회에 참석하는 것도 나고, 상회와 아울러 악행을 행하는 것도 나다. 어느 것을 내가 아닌 것으로 해서는 해결점을 찾을 수 없다. 악행을 하는 나를 죽이는 것은 자신의 정체 일부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성회에 참석하는 나와 악행을 행하는 내가 화해하여 한 길을 가는 것이다. 이 둘이 화해하는 손쉬운 방법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으나 다만 아는 것은 먼저 어쩔 줄 몰라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을 찾으시고, 어쩔 줄 모르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필요하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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