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성령강림후 제11주(C year) 걷는 법을 배우는 사람 본문

성서일과에 따른 설교준비노트/year C(다)

성령강림후 제11주(C year) 걷는 법을 배우는 사람

한, 정훈 2016. 7. 30. 22:32

Gogh, Vincent van <First Steps, after Millet, 1890>

작년에 <근로장려금>과 <자녀양육금>이란 제도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는 구겨진 형편을 펴줄, 호랑이에 쫓기던 오누이에 내린 하늘 동아줄과 같이 생각되었다. 이것저것 서류를 준비하고, 언제 입금이 되나 늘 깨어서 그날을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가슴 졸이는 내 맘과는 상관없이 깜깜소식이었다. 조급증이 의심으로 바뀌어 갔다. 주변에서는 이미 돈을 다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국세청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 왜 아직 입금되지 않았는지, 혹시 무슨 착오라도 있는 건 아닌지 이것저것 질문하며 다그쳤다. 수화기 속으로 들어가도 시원치 않을 펄떡대는 마음을 꾹 누르고, 장황한 담당자의 설명을 남김없이 다 들었다. 조급증이 바뀐 의심은 곧 분노와 절망으로 바뀌었다. 아버지가 땅이 있다는 것이다. 땅? 무슨 땅? 알아보니 이러저러한 사정이 있어서 아버지 회사에서 아버지 명의만 가져다 쓴 것이다. 재개발 되면서 받은 작은 임대아파트에 살기 위해 부모님과 동거하는 것으로 서류를 꾸며두었는데, 결과적으로 땅이 있는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되어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이 복잡한 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완전히 무너졌다. 늦은 밤 사무실에 혼자 남아 서럽게 한참을 울었다. 어디에다 하소연 할 일도 아니거니와 아버지에게 이 슬픔과 분노를 쏟아내자니 아버지도 와르르 무너져 내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침을 삼키며 초라한 현실도 함께 삼켰다.

넷째 출산을 준비하면서 정부와 지자체에서 주는 지원금을 알아봤다. 내가 받게 될 돈이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방법을 써서라도 큰돈을 주는 동네로 옮기고 싶었다.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나는 욕심이 많지만, 이런 일로 흔들리는 것이 꼭 눈먼 돈에 욕심이 나서만은 아니다. 언젠가 슬픔에 잔뜩 취해서 이런 말을 내뱉은 적이 있다. "나는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고 싶다.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놓고 가난한 사람과 함께하는 그런 거 나도 하고 싶은데, 나는 자발적 가난이 아니다. 붓다는 왕자였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나는, 우리 아버지도 가난하고, 나도 가난하다. 그냥 가난하다. 아 짜증 나." 실없는 이야기다. 귀담아들을 필요도 없고, 동정도 판단도 부질없다. 나보다 더 힘들게 산 -또 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가난하다고 말하기에 내가 가진 것이 많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내 삶이라는 게 이렇게 맥이 없다. 자발없이 내 삶을 가소롭다 여기는 것은 자발적 비움, 낮춤이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러지 못 한 채 선택당했다고 하는 사실을 수치심으로 앓는 까닭이다. 더 절망인 것은 이 삶에서 벗어나야 할 명분도 없으며, 희망도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당신에게 돈을 꾸었느냐며 카드사 상담원을 쏘아 붙인 일은 이제 우스개 농담거리로 남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형편은 다르지 않다. 구역질이 날 만큼 허리띠를 졸라 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자족하며 사는 일도 쉽지 않은 뭣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모지리가 된 심정일 때가 잦다. 물론 매일 걱정하고, 불평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제법 긍정적이고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카드결제일에 맞춰 한 달에 한 번 달거리를 한다. 며칠 전에 그 열병을 앓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 뿐이다.

인간의 보편적 삶 아니, 보편적 인간의 삶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그래서 내 나름의 이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때때로 사람이 저 자신의 삶을 구원해 줄 희망을 손에 잡히는 것에 걸 때가 있다고 추측한다(나는 그걸 탓할 만큼 영성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길게 한 셈이다). 다른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내 삶을 한 번 웃고, 한 번 우는 단조로운 리듬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교훈을 좋아한다. 삶은 늘 변화가 있어서 어느 하나로 추측하기가 쉽지 않다. 웃었다가 울기도 하며, 울다가 웃기도 한다. 자기검열이 심한 나는 웃을 일이 있으면, "금방 울 일이 있을 거야." 하고 그때 그때 감정을 지우려고 애쓰기도 한다. 실없는 짓이다. 어쩌면 웃을 때 크게 웃고, 울 때 마음껏 우는 것이 더 정직한 태도에 가까울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돈이 답이 아니라는 진실에 너무 빨리-기어 넘지 못하고 단박에 뛰어넘어- 도달하여, 돈 때문에 울었다 웃었다 하는 사람의 심정을 가소롭게 여길 때가 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아주 적은 돈을 주면서 가슴을 활짝 펴고 일을 시킨다. 돈 가지고 아쉬운 소리 하는 것은 어쩐지 믿음이 없는 일인 것처럼 몰아가는 가소로운 문화가 있다.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돈이 답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의 신념을 하찮게 만든다.

('세상에서는 돈이 답이야' 정도의 자기 기만적 신념이 아니라) '세상에서는 돈이 답이어야 해'라고 믿는 우상 숭배적 신념으로 세상을 지배하려는 자들이 있다. 그 신념과 신념의 체계 안에 땅을 들끓게 하는 모든 악이 들어있다. 너무 순진해서도, 너무 지혜로워도 악의 의지를 막을 수 없다. 너무 순진한 이들은 하나 이득 될 것도 없으면서 자기 명의를 잘도 빌려주고, 너무 영악한 이들은 자신이 이 체계를 꿰뚫고 있다고 믿으며 스스로 빛이 되려고 한다.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자고 한 일일 텐데, 그 눈 밝은 이들에게 검열당하는 기분을 자주 느낀다. 지뢰 찾기 게임을 하는 심정이랄까. 천국에는 비평가가 적을 거로 확신한다.

성경이 힘주어 말하려는 것은 인생을 붙드는 것이 근본적 신뢰여야 한다는 것일 텐데, 이 말이 돈에 울고 웃는 모든 사람을 아래로 보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왜 하나님을 믿지 못하냐고 회초리를 내리치듯이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인정머리 없는 짓인지 여섯 식구의 가장이 되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지난날을 기억하며 많이 뉘우쳤다.) 기독교인이 신앙 안에서 저 자신이 가진 밑천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신뢰 안에서 풍요로움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안타까운 일이다. 자신의 존재를 꽉 붙드는 자기보다 든든하면서 자애로운 힘을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누릴 복이어야 한다. 인생을 묶는 줄이 허무나 우연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에 가깝고, 점진적 진보보다는 파국적 종말에 역사의 운명이 훨씬 열려 있다는 사실이 진실에 가깝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어떤 절망의 순간에 냉정한 현실인식보다 근본적인 신뢰와 확신 그리고 의미의 획득이 인간에게 얼마나 필요한가. 또 그것이 희망고문이 아니라 이제까지 인생을 견인한 참된 신념이었다는 것이 기독교인인 내 신념이다. 돌아보면 그때 그 절망을 뚫고 용케 살아남았다는 것에 감사한다. 기억은 결국 내일을 위한 것이다. 내일 이 말이 힘을 잃을 말이 아니라면, 든든한 논리가 아닌 신뢰를 가지고 나에게 또 우리에게 이야기 하고 싶다. 하나님은 인생을 사랑하신다. 그리스도인은 걷는 법을 배우는 사람이다. 넘어지지 않게 붙들어 주는 엄마가 있고, 몇걸음 앞에서 우리를 부르는 아빠가 있다. 혹시 넘어질 때 달려와 줄 분들이다. 이걸 믿고 싶고, 그래서 정말 믿어질 때 새로운 삶의 문이 열릴 줄로 믿는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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