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위로받는 사람의 신뢰 본문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 예수께서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앉으셨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누가복음 24: 13-31, 새번역)

걷는 법을 배우는 사람
지난 토요일에 가족과 함께 외식을 했다. 옆 테이블이 가까워서 원하지 않아도 대화 소리가 들렸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에게 어른이 용돈을 쥐여 주면서 “사춘기 오면 안 돼”라고 덕담(?)했다. 돈을 받은 아이는 손에 든 지폐를 흔들면서 “돈이 있으면 사춘기가 안 와요”라며 기뻐했다. 이제 이런 일로 충격을 받지는 않지만,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코로나 시기에 어느 리서치 센터에서 17개 선진국을 대상으로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주제로 설문조사를 했다. 14개 나라가 첫 번째로 ‘가족’을 꼽았고, 세 나라는 가족 아닌 다른 응답을 했다. 그 세 나라는 스페인, 한국, 대만인데, 스페인은 건강을, 대만은 사회를 택했다. 한국은 ‘돈’을 꼽았다(https://www.pewresearch.org).
돈을 좋아하는 아이나 돈을 삶의 의미라고 말하는 사람을 비난할 마음은 없다. 내가 그들 못지않게 돈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돈 때문에 울고 웃는 사람의 심정을 가소롭게 여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왔기 때문이다. 성경이 내내 힘주어 말하는 것이 믿음을 가지라는 것일 텐데, 이 말이 돈에 울고 웃는 사람을 아래로 보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돈이 아니라 신뢰의 문제를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돈이 삶의 첫 번째 의미가 된 것은 타락의 결과라기보다는 신뢰를 잃어버린 삶의 증상에 가깝다. 나는 여기에 큰 비애를 느낀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인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신뢰의 풍요로움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문제라기보다는 슬픈 일이다. 가진 밑천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자신의 존재를 꽉 붙드는 하나님을, 그분의 크고 자애로운 성품을 느끼며 사는 것은 기독교인이 누리는 복이어야 한다. 고흐의 그림 중에 밀레의 모작인 첫걸음마(First Steps, 1890)란 그림이 있다. 걷는 법을 배우는 아이와 그 아이가 넘어지지 않게 붙들어 주는 엄마가 있고, 몇 걸음 앞에서 팔 벌려 아이를 부르는 아빠가 있는 풍경을 담았다. 그림에 담긴 풍경은 아주 사소한 일상일 뿐이지만, 우리가 어디서 시작하는지 기억하게 하는 소박하지만 빛나는 무언가가 있다. 기독교인은 신뢰 속에서, 걷는 법을 배우는 사람이다.

한발 없는 말이 절구 친다
망아지는 태어난 지 몇 시간 만에도 뛴다는데, 그에 비하면 인간은 나약하기 이를 데 없다. 지금도 철이 들었다고 자신할 수 없으나 아버지를 벽으로 느낀다거나 어머니에게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어요?“라고 악을 쓰던 그 시절은 다행히 지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제는 그런 말을 들어야 할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내가 아버지에게 도전하고, 어머니에게 악다구니를 부린 것처럼 언젠가는 우리 아이들도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갈 텐데, 어쩌면 자연스럽다고 해야 할 이런 날의 상상이 전혀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 날을 견디기 위해 남겨둔 이야기 중에 하나를 소개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이야기다. ”아빠, 이 말 알아? 한발 없는 말이 절구 친다.” 둘째가 어린이집 숙제라며 잠자리에서 나한테 이 문장을 이야기해줬다. 무슨 뜻인지 도저히 알 수 없어서 다음 날 아침에 첫째 아이에게 물었다. “어제 유빈이가 어린이집 숙제라고 속담 이야해 주던데, ‘한발 없는 말이 절구 친다’라는 이 속담 알아?” 첫째는 모른다고 대답한다. 혹시나 해서 둘째에게 다시 물었다. “이 말이 무슨 뜻인데?” 그랬더니 “아빠, 말조심해야 한다는 말이야”라고 한다. 이 말을 듣더니 첫째가 “아,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라고 했다.
자수성가란 “물려받은 재산이 없이 자기 혼자의 힘으로 집안을 일으키고 재산을 모음”을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물려받은 재산이 없는 사람이 집안을 일으킬 수 있지만, 그것이 온전히 혼자의 힘만으로 이뤄낸 것일 수는 없다. 출세도 마찬가지다. 그를 그 자리로 이끈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며 그들의 성과도 온전히 개인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천정근 「고뇌가 없다는 것」). 사람은 누구나 돕고, 도우며, 배우고, 가르치는 관계 속에서 무언가 이루고, 어떤 자리에도 오르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발 없는 말이 절구 친다’ 여기서 시작한다.

위로받는 사람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걷고 함께 먹으면서 눈이 밝아졌다. 걷는 것은 가장 범속한, 따라서 가장 인간적인 몸짓이다(다비드 드 브르통). 먹는 일도 마찬가지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가장 범속한, 따라서 가장 인간적인 몸짓을 통해 제자들의 눈을 밝게 하셨다. 우리는 돈이 덕담이 되고, 인생의 의미가 되는 세상을 살고 있다. 인생을 견딜 힘을 획득하기 위해 어딘가로 떠나야 하고, 일상 아닌 특별한 경험에 값을 지불하는 삶의 방식이 상식이 된 세상을 살고 있다. 이런 것들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어디서 시작하는지 기억하고 싶다.
어버이날 부모님께 드리는 꽃 카네이션(carnation)은 기독교인에게 좀 더 특별한 메시지와 연결된다. 카네이션은 피부, 살, 몸을 뜻하는 말에서 왔다. 그러니까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는 것이 우리에게 몸을 주신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 말씀이 육신이 되심을 성육신(成肉身), 곧 인-카네이션(in-carnation)이라고 한다. 성육신은 ‘carnation’ 앞에 ’in’이 붙은 말이고, 풀어 말하면, 하나님/말씀이 우리 몸을 뚫고 들어오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박명림).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뚫고 들어오셨는데, 함께 걷고 함께 먹는 가장 인간적인 몸짓으로 들어오셨다. 기독교인은 여기서 시작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가장 인간적인 몸짓을 신뢰해야 한다. 나면서부터 뛰기 시작하는 인생은 없다.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이 철이 들어 제구실하고, 마침내 자기 걸음을 걷게 되기까지는 우리가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는 엄마와 같은 존재, 몇 걸음 앞에서 팔 벌려 우리를 부르는 아빠와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 우리는 혼자 걸을 수 없고, 혼자 걸어서도 안 되며, 무엇보다 결코 혼자 걸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은 함께 걷는 사람이다.
함께 걷는 것은 범속한, 따라서 가장 인간적인 몸짓이지만, 가장 빛나는 일이기도 하다. 소설가 김연수의 말마따나 ‘추억을 만드는 데는 최소한 두 사람이 필요’하다. ‘혼자서 하는 일은 절대로 추억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결국 우리를 위로할 것‘이라는 말을 믿는다(「지지 않는다는 말」 ’혼자에겐 기억, 둘에겐 추억‘). 우리에게는 빛나는 추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추억이 빛이 되는 순간이 필요하다. 오늘, 다른 사람과 함께 걷고, 조용한 밥집에서 함께 식사하면서 추억을 만들어보길 바란다. 오늘의 추억이 훗날 우리의 어두운 날을 비추고,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 기독교인은 위로-부터 받는 사람이다.
새가정 2023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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