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듣는 사람의 열매 본문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 …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요 10: 3-4, 새번역)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가 돌아와서 히브리 말로 “라부니!“ 하고 불렀다.“(요 20: 16, 새번역)

읽고 읽히는 순간
‘한 길 사람 속’이란 말이 있다. 보통은 뒤에 ‘모른다’를 붙여 사람을 알기 어렵다는 뜻으로 쓴다. 사용되는 맥락도 부정적이다. 하지만 알기 어렵다는 것을 꼭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알기 어렵다는 것은 알아갈 것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내와 십수 년을 함께 보냈지만, 여전히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있다. 최근에 흥미로운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옥상에 올라가면 아내는 마을 쪽을 바라보고 앉고, 나는 도로 쪽을 바라보고 앉는다. 오랜 대화 끝에, 아내는 상대방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을 사랑이라 생각하고, 나는 정반대로 무언가를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유는 모르지만, 서로가 바라보는 방식이 다르고, 사랑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두 사람이 다르다는 사실 자체보다 어째서 이런 것을 그동안 몰랐는지 더 오래 생각했다.
사람이 이렇게 다르고, 서로를 알기 어려운데, 흥미롭게도 사람에게는 상대방이 나를 알아줬으면 하는 근본적인 욕구가 있다. 마치 읽히기를 바라는 글처럼, 숨바꼭질하는 아이처럼 사람은 상대방에게 파악되거나 발견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정확히 파악한 글이 삶을 견인하고, 숨바꼭질에서 발견된 아이가 즐거워하는 것처럼, 상대방이 나를 정확히 알아주면 몸이 가벼워지고, 이따금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상대방에게 파악되고, 발견되는 때를 기다린다. 그 순간의 기쁨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누군가와 오차 없이 읽고 읽히는 순간을 ‘소통(communication)의 성공’이라 부른다. 소통의 성공은 그 자체로 기쁨이다(히라노 게이치로). 소통이라는 말 자체에 성공의 의미가 담겨 있으나, 실패하는 소통이 있으므로 소통이 된 상황에 굳이 성공이라는 말을 붙인다.

배워도 어려운 일이지만
소통의 성공을 소망하지만, 실패한 소통도 괜찮다. 진짜 문제는 소통 자체가 없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상황이다. 사람은 관계 맺는 존재이므로 소통-을 시도- 해야만 한다. 소통 없는 관계는 시간 없는 생명과 같다. 시간이 없다면 생명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황현산). 마찬가지로 소통이 없는 관계는 상상하기 어렵고, 동그란 사각형처럼 형용모순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결과에 상관없이 소통을 시도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소통의 성공이 기쁨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소통을 배우지 않는다. 물론 소통을 배우면 소통을 잘하게 된다거나 소통에 성공하게 된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한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며, 나 또한 스스로 소통을 잘한다고 자신하지 못하므로 주저하게 된다. 다만 배운다고 쉬워지지 않기 때문에 배울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배워도 어려운 일이 배우지 않으면 얼마나 거 어렵겠는가 하는 쪽으로 한 발을 내디딘다.
소통을 배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소통을 배우는 것은 인간에 대한 태로를 배우는 일이다. 소통을 배운다고 하면, 소통 잘하는 법이나 기술을 배우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것들은 두 번째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간에 대한 태도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용되는 소통의 방법이나 기술이 오히려 소통을 방해하는 일이 잦으므로 말하는 법이나 듣는 법에 의존하는 대화에 회의적이다.
실제로 소통에 도움이 되는 듣는 법과 말하는 법이 없지 않으나 그런 것들은 인간에 대한 태도를 결정한 후에 배워야 한다는 입장이다. 태도는 가르치기 어렵고, 배우기는 더 어렵다. 하지만 꼭 필요한 공부라는 확신이 있다.

듣는다는 것
아바(교부) 펠릭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제자들이 그를 찾아가 말씀을 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노인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오랜 침묵 뒤에 입을 연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가? 그러나 오늘날에는 더 이상 말씀이 없다네! … 더 이상 그들의 말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라네.“(파커 파머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국제듣기협회(International Listening Associaition)는 듣기를 이렇게 정의한다. ”듣기란 언어적 메시지와 비언어적 메시지를 수신하고, 이것으로부터 의미를 이해하고, 이것에 반응하는 과정“이다. 요컨대 듣는다는 것은 말로 한 것과 말로 하지 않은 것 모두를 받아들여, 이해하고, 반응하는 과정이다. 이때 반응은 좁은 의미에서는 듣고 이해했다는 표현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듣고 변화하거나 실천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목소리를 전달받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의견이나 주장을 능동적으로 수용한다는 말이고, 또 어떤 경우에는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존중한다는 의미가 있다. 국제듣기협회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듣기 십계명’ 같은 것도 제안하는데, 몇 가지 옮겨보겠다. “말하는 사람에게 100%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대답하기 위해 듣기보다 이해하기 위해 듣고 있습니까?”, “상대방이 말하는 동안 답변을 준비하려는 유혹을 거부했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마음을 바꿀 수 있습니까?”, “말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말하지 않은 것도 알고 있습니까?” 등이다.

신뢰의 결과는 신뢰
월간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 실린 생태 만화를 모아 만든 책 「작고 느린 만화가게」에서 ’숲속의 현자‘라는 놀이를 알았다. 나무에 끈을 묶어 둔 다음에 거기에 각자의 고민이나 궁금증을 종이에 적어 달아 둔다. 그런 다음 다른 사람이 적은 종이를 펴보고 자기 생각이 아닌 ’나무의 생각‘을 듣고 답을 적어주는 놀이다. 나무의 생각을 어떻게 듣느냐는 참가자의 질문에 저자는 나무를 안고 물어보면 나무의 소리가 들릴 거라고 대답한다(황경택).
소통은 상대에 대한 인정과 존중, 곧 상대에 대한 신뢰 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한다. 이 말을 관계에 적용해 보면, 신뢰는 듣기에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통의 성공을 경험한 두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것이 신뢰이므로 신뢰는 소통이라는 공동 작업의 결과(열매)다. 그런데 소통이 신뢰 없이 불가능하다면, 결론적으로 신뢰란 신뢰의 결과(열매)이기도 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난 사람, 막달라 마리아는 처음에 예수님을 몰라봤다. 하지만 예수님이 ’마리아야!‘하고 이름을 불렀을 때,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목자가 양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르고,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따른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실현된 아름다운 순간이다. 신뢰의 결과(열매)를 신뢰하는 사람들의 소통은 때로 아름답다.
새가정 2023년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밖에서 쓴 글 > 새가정(2023)'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듣는 행복의 크기 (1) | 2024.01.05 |
---|---|
영원히 기억되는 말 (1) | 2024.01.01 |
위로받는 사람의 신뢰 (1) | 2023.12.28 |
자기와 화해한 오늘 (1) | 2023.12.27 |
늘 새로운 오늘 (1) | 2023.1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