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영원히 기억되는 말 본문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왔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셨다.”(요 4: 7, 새번역)
순결한 말
“나는 순결한 언어들을 좋아했다. 내가 순결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과 부합한다는 뜻이다. … 그러나 나는 땀내가 나는 말들을 가장 좋아했다.”(황현산 「말과 시간의 깊이」) 이 문장을 기억할 때마다 우리가 일상에서 또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생각했다.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모든 사람은 천하보다 귀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말이 다 귀한 것은 아니다. 함부로 말해버리고, 나오는 대로, 되는대로 내뱉는 말들. 세상에는 쓸데없는 말, 차라리 하지 말았어야 할 말도 있다. 안타깝게도 누구도 이런 말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모두가 자기 말을 하고 살지만, 우리가 하는 말이 다 귀한 것은 아니다. 누구나 존재 가치에 반하는 말들의 무게로 몸이 무거울 때가 있다.

기억되는 말
이번 연재에서는 ‘말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먼저 ‘기억되는 말이란 어떤 말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이것은 ‘어떤 이야기가 살아남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관이 있는데, 결론을 말하면, ‘보편성, 일반성을 획득한 이야기’(이윤기 「무지개와 프리즘」)가 시간을 견디고 살아남는다. 기억되는 말이란 보편성, 일반성을 획득한 말이다.
여기에 도달하지 못한 말들을 가벼운 말이라고 부른다. 시간을 견디지 못했다고,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가벼운 말은 쓸모가 없다. 시간을 견딘 모든 것에는 무게가 있는데, 어떤 경우든 시간을 견디고 나면, 또 다른 존재가 시간을 견디게 돕는다.
기억되는 말을 이해한 사람의 말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말은 차이가 있다. 보편성과 일반성을 획득한 말이 시간을 견디는, 기억되는 말이라면, 어떻게 보편성과 일반성을 획득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넓은 길과 좁은 길이 있다. 만약 우리가 좁은 길을 선택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말이 좀 더 순결한 말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넓은 길: 말의 공식
말에는 공식이 있다. 모르는 사람은 배워야 한다. 가끔 연예인이나 유명 운동선수의 인터뷰를 보면서, ‘저 사람은 아직 서툴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개인의 성취를 넘어서 공공의 영역에 다다른 사람은 정답을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정답을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의 인터뷰는 보는 내내 불안감을 준다. 공적인 인물은 공적인 자리에서 정답을 말할 줄 알아야 한다. 말의 공식을 따르는 것은 판에 박힌 것이 아니다. 자신이 공적인 존재임을 자각한다는 방증이다.
비유일 뿐이지만, 이것이 넓은 길이다. 공식을 따르는 것,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말을 하는 것, 이미 시간을 견딘 말, 벌써 쓸모 있는 말의 지위에 도달한 말을 따라 하는 것이다. 우선 공식을 따르는 일을 계속하면, 나중에는 공식을 따르지 않아도 상대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는다. 일부러 하지 않는 것과 몰라서 못 하는 것의 차이는 크다. 전자는 의미 있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후자는 그냥 미련한 것이다. 말의 공식을 모르는 사람은 배워야 한다.

넓은 길의 한계
그러나 넓은 길은 명확한 한계가 있다. 공식을 알고 활용한 것은 말 그대로 공식을 ‘이용’한 것이다. 그런데 공식을 따라 말한 사람은 자기의 말이 누군가를 설득하고 있다고 착각하며(듣는 사람을 안다는 착각), 공식을 따른 말을 듣는 사람은 자신이 말하는 사람-의 의도-까지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말하는 사람을 안다는 착각). 어쩌면 말의 공식을 따르는 목적은 서로 모른다는 것을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기 위함이다.
나는 목사지만, 설교에서조차 모두가 듣자마자 ‘아멘’이라고 하는 말을 주저한다. 즉각적으로 모든 사람이 ‘아멘’을 외치게 하는 것은 영향을 끼친 결과가 아니라 ‘이용을 끼친 결과’(이승우 「캉탕」)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즉각적으로 약속한 반응이 필요할 때, 넓은 길에 목적지가 맞닿아 있을 때는 말의 공식이 유용하다. 그러나 서로 영향을 끼쳐야 하고, 서로 모른다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는 상황에는 적합하지 않다. 이것이 넓은 길의 한계다.

좁은 길
좁은 길은 넓은 길과 작동하는 방식과 원리가 다르다. 넓은 길의 그것이 공식이라면, 좁은 길은 신뢰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수가란 마을에서 물 길으러 나온 여자와 나눈 긴 대화를 기억해 보다. 흐름이 여러 번 바뀌지만, 어째서 이 대화가 시간을 견디고 기억되는 이야기가 되었는지 두 군데서 잘 드러난다.
첫 번째는 마실 물을 좀 달라는 예수님의 요청에 대한 여자의 처음 반응이다.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물론 주된 분위기는 낯섦이지만, 그렇다고 두려움의 표출로 읽히지는 않는다. ‘악플’보다 무서운 것이 ‘무플’(무댓글)이라고, 아마 정말 이 낯선 유대인이 싫고 두려웠다면, 대꾸하지 않고 돌아가 버렸을 것이다. 나는 이 대화가 여기서 많은 부분 경절됐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이 대화가 사적인 문제에서 공적인 주제로 전환되는 부분이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낯선 유대인이 기구한 관계 문제를 정확히 짚었을 때, 여자는 곧장 ‘예배’에 관해서 질문하다. 바로, 이 순간 개인의 이야기가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비약한다. 공적인 주제로 전환되면서 이 대화는 기억되는, 아니 기억되어야 할 이야기가 되었다.

영원히 기억되는 말
보편성과 일반성이 정치나 경제, 또는 신문 사회면에 실릴 만한 이야기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사실과 직면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저런 이야기로 피상적 관심에 자기 자신을 숨기는 경우가 있다. 보편성과 일반성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느낌에서 시작한다.
이 사적인 이야기들을 신뢰 속에서 나누다 보면(안전), 서로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이 드러나고(사실), 바로 그 지점에서 서로의 말이 만나는 어떤 주제가 확인된다(공적인 영역/주제). 이때 공적인 영역으로 비약하기를 선택하면, 이제 그 대화는 시간을 견딜 보편성과 일반성을 획득할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일부러 괄호를 사용해서 ‘안전-사실-공적인 영역/주제’라는 주석을 달았다. 어떤 면에서는 사족이고, 도식화의 한계를 알면서도 무리수를 두는 것은, 다음 연재에 이 추상적인 개념이 실제로 작동하는 대화의 방법을 소개할 것이기 때문이다. ‘서클(Circle)’이라고 하는 이야기 방식을 다음 기회에 설명하겠다.
목사 이전에 기독교인이지만, 설교나 예배의 언어가 언어의 이상(이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작 중요한 말은 일상을 낯설게 만드는 어떤 순간에 경험된다. 물 길으러 나온 여자는 오랫동안 ”마실 물을 좀 달라“고 한 낯선 유대인의 말을 기억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이 예배가 되었을 때, 신앙적 질문을 가진 몯느 사람의 목을 축이는 영원히 기억되는 말이 되었다.
2023년 새가정 7,8월 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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