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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과 포도주의 진실 - 생존에서 존엄으로

한, 정훈 2013. 3. 24. 07:18

광주에는 이단이 많습니다. 신천지도 많고, 구원파 교회도 많습니다. 왜 사람들이 이단에 빠질까 생각해 보면 두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하나는 교회가 결핍을 겪는 사람들에게 성실하지 않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객관주의에 함몰됐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 두 가지에서 비롯된 문제를 생존존엄이란 단어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삶에서 결정적인 결핍을 겪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해결되지 않는 만족감을 이단으로부터 얻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단순히 돈이 없어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소외를 경험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가난하면 왠지 목소리가 작아집니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축복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반드시 저주는 아닙니다. 그런데 풍요를 강조하다 보니 가난한 사람들이 움츠러듭니다.

 

현대사회에서 가난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구조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게을러서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지 않게 태어난 사람보다 가난을 딛고 일어나는 게 더 어렵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요즘 청년들이 패기가 없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데 좀 불편합니다. 열정을 쏟을 데가 없어서가 아니라 윗세대로부터 생존을 위한 삶 밖에는 배운 것이 없기 때문은 아닌지 되묻고 싶습니다.

 

의미를 추구하는 일은 사치가 아닙니다. 의미의 결핍은 내면의 가난입니다. 돈이 있어도(많아도) 의미가 결핍돼 허덕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기독교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면서 경험한 구원은 허무에서의, 허무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실수투성이인 인생에서 느끼는 허무가 벼랑으로 달려가는 돼지 떼처럼 소멸을 향해 갈 때 예수에게서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예수가 제게 전한 메시지는 존재에 대한 관심과 지지였습니다.

 

제 인생을 하찮게 여겨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을 만나면 죽이도록 미웠습니다.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는 <그릇>이라는 시를 그래서 이해합니다. 조각난 제 인생이지만 사실은 신으로부터 꾸준한 지지와 관심을 받아왔다는 게 믿어졌을 때 다시 생명을 얻었습니다.

 

저는 이제 고래고래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것보다 내면을 들여다볼 정도로 침묵으로 기도하는 게 좋습니다. 청원하는 기도를 넘어 조율하는 기도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내면에 더께처럼 내려앉은 허무를 벗겨내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기도하는 사람들을 이해합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허무의 무게에 짓눌려버리기 때문입니다. 저도 숨이 모자라고 간이 저릴 정도로 주여를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때를 지나왔기 때문에 이해합니다.

 

어쨌든 교회가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지지와 관심에 드러내는데 관심을 쓰면 좋겠습니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가난해서 소외당하는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풍요가 아니라 관심과 지지라는 사실을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정답만큼 힘든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게 없습니다. 오답에도 고개를 끄덕여줄 수 있을 만큼의 휴머니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객관주의입니다. 예수에 관해서는 많이 알지만 예수를 (온새미로) 알지 못하면 진리를 객관주의로 이해합니다. 교리를 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관념을 넘지 못한 교리는 독이 될 때가 많습니다. 구원파 교리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주장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죄 용서함을 받았는데 왜 계속해서 회개하느냐?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 회개하는 거라는 주장입니다.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관념을 넘지 못한 교리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좋은 아버지는 자식에게 떳떳한 아버지가 아니라 마음 한 구석에 더 잘해주지 못한미안한 마음을 가진 아버지입니다. 좋은 자식은 부모님에게 빚진 마음을 가진 아들이고, 어느 정도의 죄책감을 늘 유지하는 딸입니다. 더 나아가서 역사와 존재 앞에 부채의식이 없는 사람은 아직 덜 된 사람입니다.

 

인생을 관념이 아니라 살과 피로 이해한다면, 교리를 관념이 아니라 떡과 피로 이해한다면 인생에 대한 이해가 이렇게 얄팍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안을 외치는 수많은 목소리들 중에서 객관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주장과 비평이 많습니다. 좋은 말, 날카로운 비평은 좋은데 그게 사회에 적용될 때는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실은 복잡하기 마련입니다. 복잡한 것을 풀어나가는 것은 결국 인격이고 공동체입니다. 자기 자신이 대안으로 빚어지는 인격과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주관주의도 경계해야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와 한국 교회 안에서는 객관주의가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생존이 보편적인 목표이던 시대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는 존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존엄을 위해 애쓰는 길이 생존도 소중히 다루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다 같이 가난하던 시대는 이미 지난 지 오래입니다. 적어도 젊은이들 눈에는 그렇습니다. 쌀이 없으면 라면이나 빵을 먹으면 된다는 말에 혀를 차는 어른들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실제로 그것밖에 겪지 않은 세대에게 자꾸 쌀을 위해 기도하자고 하면 어떡합니까?

 

혼자만 잘 살면 재미가 없다는 사실, 나는 어느 정도 살만하지만 아직도 누군가는 착취당하고 있고 살만하지 않다는 사실, 다 같이 부자 되도 환경이 파괴되면 다 함께 망한다는 사실, 복수는 복수를 낳기에 화해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 통념과 객관주의적인 좌표로 양과 염소를 걸러내는 것은 오만이라는 사실, 누구든지 피부색이나 어느 지역 출신인지에 관계없이 사람이면 모두 존귀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이를 위해서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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