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두 번째, 가을 편지 본문
오늘 아침, 뜬금없이 십여 년 전 부끄러웠던 일이 생각 났습니다. 잊고 있던 기억이 인기척도 없이 불쑥 커튼을 열어젖히는 바람에 피할 새도 없이 부끄러움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때 왜 그랬지?' 가슴 한쪽이 시립니다.
한 문학평론가는 어떤 인터뷰에서 "나이가 들면 어둠은 더욱 많아집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나이가 들면 어둠에 익숙해지고 어둠을 용서하게 된다는 거에요."라고 했습니다(황현산 교수님 <GQ> 인터뷰 중에서).
이 말이 기억나서였는지 애써 외면하고 싶은 그 기억을 뱉어내지 못하고, 침을 꼴깍 삼키듯이 삼켰습니다.
입을 넘어 뱃속으로 넘어간 철 들지 않은 기억이 많아서 뱃살이 늘어가나 봅니다. 문득 이 시가 생각이 나네요.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오는 거리에는
사십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김수영 시인의 <죄와 벌> 중에서
자신을 용서한 사람만이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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