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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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게 문제를 해결하는 게 좋다.

한, 정훈 2012. 3. 7. 01:13

깨진 그릇은 칼이 된다는 시인의 말을 생각해본다. 애써 지켜온 긴장이 깨지는 순간 남도 베고 자기도 베는 칼이 된다. 다른 사람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는 애써 유지하고 있는 긴장을 깨뜨리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을 바로잡기 위해서 흔히 쓰는 방법은 분석과 설득이다. 날카로운 분석과 풍성한 정보, 그리고 현란한 수사학적 설득은 좋아요를 이끌어낸다. 하지만 그뿐이라면? 거기서 더 나아가 '좋아요'를 누른 생각이 삶으로 번역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만 자신으로 사는데 보탬을 주지 못한다면 그게 뭔 대수인가? 자신이 바뀌지 않는 좋아요 그게 뭔 대수인가?

 

인류는 항상 두 가지 방식을 고집해 왔다. 불쑥 튀어나온 맹수 앞에서 도망칠 것인가, 싸울 것인가? 이 양자택일의 틀거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이야기하면 꼭 한 마디씩 한다. “그래서 대안이 뭔데?” 짜증난다. 외려 긴장을 받아들이고, 끝끝내 자신으로 살게 하는 힘을 북돋우지 못한다면 부질없다.

 

참다운 지식은 객관적 지식이 아니라 주관적 지식이다. 객관적 지식이라는 것은 늘 사람이든 사물이든 타자화 하기 때문에 에고(ego)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다. 바깥에 있는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가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게 좋다. 이걸 지키면서 나답게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게 좋다. 힘들지만 그렇게 하고자 할 때 존재하는 게 긴장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는 합리적인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나답게 사는 게 뭔지 귀 기울일 시간과 공간을 절약(?)하자는 허울 좋은 폭력과 다름없다. 긴장을 깨는 폭력 때문에 결국 남을 베고 자기를 벤다.

 

내가 지금 하는 고민과 겪는 갈등은 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거다. 내가 이길 거부하면 순간 고민과 갈등은 해결될지 모르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내가 극복해야 한다. 문제가 있는 게 문제가 아니다. 문제를 싸워서 이기라고 에고를 부추기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위로에 목매는 회피를 부추기든지 우리는 때때로 이런 식이다. 삶의 문제가 불쑥 튀어나온 맹수와 다를 게 없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문제 앞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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