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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인 너무도 종교적인

통째로

한, 정훈 2013. 7. 2. 16:32

삶은 근본적으로 복잡하고, 모호하다. 늘 내 실력 이상을 요구하는 숙제와 같이 버겁다. 이 길이 맞는지, 저 길이 맞는지 알 수 없다. 또 안다고 해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유에 대한 욕구만큼이나 책임에 대한 욕구도 강하다.

얼마 전에 교외에 있는 식당에 갔다. 어린 여학생 둘이 식당일을 돕고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이 건네는 능글거리는 농담에 적절히 대꾸하면서 숙련되지는 않지만 익숙하게 일을 했다. 보다가 문득 질문이 떠올랐다. ‘쟤들은 지금 이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걸까?’

하고 싶어서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좀 더 진취적으로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이 집 딸이니까 당연히 부모님을 도와야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누구 말이 맞는지 나는 옳게 판단할 자신이 없다.

지금 내 자리는 내가 오랫동안 꿈꾸던 자리이기도 하면서 아니기도 하다. 30%만이라도 자유가 주어진다면 어디든지 갈 마음이었다. 그런데 60%가 허락됐다. 고마운 마음이다. 그러나 70%가 40%로 줄어들었다고 해서 만만한 것은 아니다. 매일 마음이 가분하지만은 않다. 식당에서 일하는 여학생들을 다시 떠올려 보니 가엾기도 하고, 또 멋있기도 하다.

내가 30을 기대하고 선물로 얻은 60은, 사실 30(+70=100)이고, 60(+40=100)이다. 마트에 가면 부위별로 살 수 있다. 그러나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다 통째다.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이 한데 뒤섞인 것이 삶이다. 삶은 내가 버거워한다고 타협하지 않는다.

자기연민을 결연하게 떨쳐내는 연습을 날마다 하고 있다.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분리할 수는 없다. ‘약해지지 말자’ 마음에게 말한다. (힘겹게) 살 만 하다. 자기연민을 거절하면서 뻔뻔해지는 연습도 함께 하고 있다. 수치스럽고 감추고 싶은 내 모습도 마찬가지로 원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삶을 개혁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나를 받아주는 존재를 (힘겹게) 인정해 가는 중이다. 자기를 계발하는 게 신앙의 목표가 아니다. 자기와 화해하는 게 목표이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중에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을 사랑할 수 없다.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남의 삶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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