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질문 없는 대답은 생명력이 없다 본문
1.
며칠 전 믿음을 찾고 있지만 믿을 수 없어서 고민하는 한 청년에게 “신이 존재한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이런 묵직한 질문을 받았다. 나는 호기심 때문에 하는 질문이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우선 숨을 가다듬고,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기억과 통찰을 모아서 널린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기듯이 대답을 했다. 긴대답이고, 너무나 개인적인 일이라 여기에 내용을 자세하게 적을 수는 없다.
어쨌든 알짬은 이거였다. “나는 내가 만난 하나님을 내 삶으로 증명할 수는 있다. 나는 나를 미워했고, 스스로를 정말 하찮게 여기고 살았다. 나로서는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내 삶의 모든 문은 닫혀있었고, 그래서 너무 허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 스스로 가장 하찮게 여길 수밖에 없던 그 시기의 나를 잊지 않고, 아니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신을 만났다. 그래서 그 이후로 별 볼 일 없어 뵈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메모장에 예닐곱 가지 까다로운 질문을 적어온 그 청년에게 내 온 지성과 감성과 영성을 담아 성실히 대답한 이유는 ‘사람의 정황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사실 내가 관심 있는 건 신의 존재가 믿어지지 않지만 믿고 싶게 하는 그 무엇을 만들어내는 그녀가 겪은 정황이다. 무슨 일을 겪었는지 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로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만남이 있던 그 날은 굉장히 보람 있는 하루였다.
2.
나는 매주 청년들을 위해 설교 준비를 하는 게 정말 즐겁다. 내게는 너무 소중한 일이다. 일주일을 다 쓰는 게 아깝지가 않다. 그러나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다. 전에는 내가 하는 일에서 대단한 의미를 발견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내 말을 잘 들으라고 강요를 많이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점점 그런 마음이 잦아든다. 실컷 말해놓고 내 말은 중요하지 않다고 다 잊어도 좋다고 자폭을 자주한다.
설교를 너무 길게 하는 게 미안하고, 잘 정리되지 못해서 제목과 내용이 다를 때가 많다는 사실이 짜증나고 부끄럽다. 그래도 요새 계속해서 새로운 깨달음이 있다. 그게 너무 행복하다. 이런 거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곧 속상한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반대로 속상한 일이 있을 때는 곧 좋은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상한 행동으로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하루’를 사는데 꽤 보탬이 된다. 감정의 손아귀에서 잽싸게 빠져 나가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3.
만남이 있던 그 날이 굉장히 보람 있는 하루였다고 말했는데, 그 말은 그 만남이 있기 전까지 며칠이 정말 힘들었다는 말과 같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무리한 일정, 각막염, 현빈이에게 각막염 전염 시킴, 관계에서의 어려움, 감기 등등 공개할 수 있는 일부터 공개할 수 없는 일까지 갖가지 힘들게 하는 일이 많았다.
이제 며칠은 또 기쁜 일이 많을 거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또 사는 게 버겁고,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생길 거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또 좋은 일. 한 번 웃고, 한 번 울고. 한 번 웃고, 한 번 울고.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는 것처럼, 봄이 오고, 겨울이 오는 것처럼. 이게 신이 허락한 내 삶의 리듬이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3.
어쨌든 질문 없는 (이에게) 대답은 생명력이 없다. 그래서 나는 질문하는 사람이 좋다. 예수가 말했다. 선생이 되지 말라고. 나는 이 말을 늘 배우는 사람이 되라는 말로 이해했다. 함께 하는 청년들이 신에 대해서 예수에 대해서 또 삶에 대해서 용기 있게 질문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생명력 있는 대답을 듣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그 청년은 내가 좋은 대답을 해서가 아니라 용기 있게 질문했기 때문에 생명력 있는 답변을 들었을 거라 믿는다.
설교 시간에 졸지 말고, 꼭 질문을 하시오! ㅋㅋㅋ 부담 주려는 거야!!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