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2026(A)사순절 셋째 주일 노아교회 설교 본문

너의 목마름은 어디 있느냐?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출애굽기 17:1-7입니다.
출애굽기 17:1-7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은 신 광야를 떠나서, 주님의 명령대로 진을 옮겨 가면서 이동하였다. 그들은 르비딤에 진을 쳤는데, 거기에는 백성이 마실 물이 없었다.
2 백성이 모세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대들었다. 이에 모세가 "당신들은 어찌하여 나에게 대드십니까? 어찌하여 주님을 시험하십니까?" 하고 책망하였다.
3 그러나 거기에 있는 백성은 몹시 목이 말라서, 모세를 원망하며, 모세가 왜 그들을 이집트에서 데려왔느냐고, 그들과 그들의 자식들과 그들이 먹이는 집짐승들을 목말라 죽게 할 작정이냐고 하면서 대들었다.
4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었다. "이 백성을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은 지금이라도 곧 저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합니다."
5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이 백성보다 앞서서 가거라. 그리고 나일 강을 친 그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거라.
6 이제 내가 저기 호렙 산 바위 위에서 너의 앞에 서겠으니, 너는 그 바위를 쳐라. 그러면 거기에서 이 백성이 마실 물이 터져 나올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하였다.
7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에서 주님께 대들었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므리바라고도 하고, 또 거기에서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하면서 주님을 시험하였다고 해서, 그 곳의 이름을 맛사라고도 한다.
봉독자: 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함께: 하나님 감사합니다.
먼저 인사 나누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은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오늘은 사순절 셋째 주일입니다. 출애굽기 본문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먼저 소설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 ‘후미에’(踏み絵)라고 하는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판을 밟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선교사인 로드리고가 후미에를 밟으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도저히 그럴 수 없었지만, 밟지 않으면 수많은 키리시탄(キリシタン, Kirishitan)이 죽임을 당합니다. 배교하라는 협박입니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 로드리고가 후미에에 발을 얹었을 때,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밟아도 좋다.” 그리고 “네 발은 지금 아플 것이다. 오늘까지 내 얼굴을 밟았던 인간들과 똑같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발의 아픔만으로 이제는 충분하다. 나는 너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니까.”
오늘 사순절에 함께 읽는 므리바 사건은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게 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너는 기적적인 구원을 경험합니다. 그 후에 광야 길로 들어와 물이 써서 먹지 못하는 마라의 경험이 있었고, 엘림이라는 안식처를 경험하고, 신 광야에서 먹을 것이 떨어져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르비딤에 이릅니다.
르비딤은 출애굽 여정 중 시내산에 이르기 직전에 장막을 친 광야의 한 지명입니다. 르비딤이라는 말은 ‘쉬는 곳, 안식, 휴식, 원기 회복’의 뜻이 있는 말입니다. 안식처가 되어야 할 이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한번 반복된 시험 거리 중 하나인 물 문제로 곤경에 처합니다. 그리고 안식처가 되어야 할 이곳은 고성이 오가는 법정이 되어 버립니다.
눈먼 사람들의 광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은 신 광야를 떠나서, 주님의 명령대로 진을 옮겨 가면서 이동하였다. 그들은 르비딤에 진을 쳤는데, 거기에는 백성이 마실 물이 없었다. 백성이 모세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대들었다.
출애굽기 17: 1-2
애굽에는 자유가 없고, 광야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애굽에는 음식과 물이 있고, 광야에는 음식과 물이 없습니다. 마라에서 쓴 물이 단 물로 바뀌는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격분하여 모세를 추궁합니다. 여기서 대들다는 표현은 ‘리브’(רִיב, rib)라는 단어인데, 싸우다, 논쟁하다 라는 뜻이지만, 소송하다, 변론하다 등 법적 분쟁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를 고소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고소의 피고인은 모세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어찌하여 자신에게 대드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격분이 단순히 징징거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라고 판단했습니다.
“"당신들은 어찌하여 나에게 대드십니까? 어찌하여 주님을 시험하십니까?” 하고 책망하였다.
출애굽기 17: 2
우리도 곤경에 처하면 화를 냅니다. 어떻게든 책임을 추궁할 대상을 찾아내고야 맙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 화를 쏟아냅니다. 물도 제때 주지 않는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 맞냐고, 어디 계시냐고, 나를 지키겠다는 약속을 잊은 것은 위법이라고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히고야 맙니다. 그들은 눈이 멀었고, 하나님이 이전에 하신 일들을 망각했습니다.
광야는 애굽과는 다른 곳입니다. 지난주에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 집, 하란을 떠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광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익숙하고 보장된 노예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불확실하고 결핍이 많지만, 자유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여기서 인간은 선을 넘지 않는,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나 목마름 때문에 격분한 이들에게 광야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열려 있는 믿음의 여정이 아니라 눈먼 자들의 싸움판이 되었습니다.
심판대에 선 하나님
당황하고 두려움을 느낀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이 백성을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은 지금이라도 곧 저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합니다.”
출애굽기 17: 4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지팡이를 들고 호렙산으로 오라고 하십니다. 바위 위에 서 계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피고인이 재판정 한가운데 서겠다고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가져온 지팡이로 바위를 내리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거기서 이 백성이 마실 물이 터져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죄인이 법의 집행을 받듯이 말입니다.
모세가 든 지팡이는 어떤 지팡이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이끈 물건입니다. 나일 강 물을 피로 바꾸고, 홍해를 가를 때 사용한 지팡이입니다. 지팡이 자체가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있는, 상징적인 물건입니다. 이제 그 지팡이가 마치 체벌하는 몽둥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서신 자리를 내리치는 도구가 됩니다.
사순절에 우리는 고난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그의 상함, 그의 찔림을 묵상합니다. 므리바에서 시작된 고소는 호렙산 바위를 내리치는 장면에 이르고, 이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매를 맞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정작 맞아야 할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은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곤경 가운데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터져 나오는 물이 죄 없는 하나님을 처벌한 대가란 것을 모릅니다. 우리가 원망하고 격분해서 얻어낸 것들이 실은 누군가의 희생의 대가, 관계를 훼손하고 얻어낸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광야에서 마시는 물이, 우리가 누리는 일상이 누군가의 상처이고, 아픔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문제를 나누면서 늘 생각하는 것이, 가르쳐 준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이들이 값비싼 물건을 사고 싶다고 조를 때, 주변에서 이유 없이 짜증을 낼 때, 근거 없이 나를 모함하거나 상처를 줄 때, 그 소용돌이가 지난 후에 어떤 때에, 슬그머니 내가 똑같이, 아니 그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렇게 알게 되어도 똑같은 시험 거리에 넘어지는 것, 한 번 더 후미에를 밟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를 깨뜨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무지한 이들의 격분과 고소에도 잠잠히 매를 맞는 하나님의 모습을 상상하게 합니다. ‘밟아도 좋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숙연하게 합니다.
네 목마름은 어디 있느냐?
오늘 복음서 본문은 요한복음 4장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 대화하는 장면이 기록된 본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저런 대화 끝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을 언급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너라.”
요한복음 4: 16
남편이 다섯이었던 것과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 사마리아 여인의 자세한 사정을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은 광야의 백성들에게 목마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반복되는 시험 거리이고, 하나님을 심판대에 세우게 만드는 풀리지 않는 목마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의 인생의 목마름을 알아보셨을 때, 대화의 주제가 바뀝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 주제는 바로 ‘예배’입니다. 사마리아인이었기 때문에 ‘예배드려야 할 곳’이 어디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한다고 가르치시며, 자신이 그리스도, 곧 메시아임을 밝히십니다.
광야에서는 물이 정말 소중한 문제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이란 존재도 정말 광야의 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목마름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제대로 보신 것처럼 인간을 응시하지 않는 종교는 종교일 수 없습니다. 인간을 응시하면 뭐가 보일까요? 뻔뻔하게 모세에게 대들고, 하나님을 재판대에 세우는 것이 보입니다. 정오에 우물가에 나오는 목마른 여자가 사실은 여섯 번째 남자와의 관계 속에서도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묵묵히 매를 맞는 하나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곤경을 놔두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각자 씨름하는 근원적인 목마름까지 해결되기를 바라십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면하느냐 여기에 실마리가 있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가르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광야 길을 걷는 우리 모두 반복된 시험 거리, 근원적 갈증, 후미에 같은 함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큽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죄를 덮을 만큼의 사랑을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순절에 “너의 목마름이 어디 있느냐?” 질문하시는 예수님,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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