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2026(A)사순절 넷째 주일 노아교회 설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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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A)사순절 넷째 주일 노아교회 설교

한, 정훈 2026. 3. 14. 22:27

 

사막은 샘을 품고 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사무엘상 16: 1-13입니다.

 

사무엘상 16: 1-13

1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사울이 다시는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못하도록, 내가 이미 그를 버렸는데, 너는 언제까지 사울 때문에 괴로워할 것이냐? 너는 어서 뿔병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길을 떠나,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가거라. 내가 이미 그의 아들 가운데서 왕이 될 사람을 한 명 골라 놓았다."

2 사무엘이 여쭈었다. "내가 어떻게 길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사울이 이 소식을 들으면, 나를 죽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너는 암송아지를 한 마리 끌고 가서, 주님께 희생제물을 바치러 왔다고 말하여라.

3 그리고 이새를 제사에 초청하여라.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내가 거기에서 너에게 일러주겠다. 너는 내가 거기에서 일러주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라."

4 사무엘이 주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니, 그 성읍의 장로들이 떨면서 나와 맞으며 물었다. "좋은 일로 오시는 겁니까?"

5 사무엘이 대답하였다. "그렇소. 좋은 일이오. 나는 주님께 희생제물을 바치러 왔소. 여러분은 몸을 성결하게 한 뒤에, 나와 함께 제사를 드리러 갑시다." 그런 다음에 사무엘은, 이새와 그의 아들들만은, 자기가 직접 성결하게 한 뒤에 제사에 초청하였다.

6 그들이 왔을 때에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속으로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시려는 사람이 정말 주님 앞에 나와 섰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7 그러나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셨다.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8 다음으로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 아들도 주님께서 뽑으신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

9 이번에는 이새가 삼마를 지나가게 하였으나, 사무엘은 이 아들도 주님께서 뽑으신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

10 이런 식으로 이새가 자기 아들 일곱을 모두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으나, 사무엘은 이새에게 "주님께서는 이 아들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뽑지 않으셨소" 하고 말하였다.

11 사무엘이 이새에게 "아들들이 다 온 겁니까?" 하고 물으니, 이새가 대답하였다. "막내가 남아 있기는 합니다만, 지금 양 떼를 치러 나가고 없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말하였다. "어서 사람을 보내어 데려오시오. 그가 이 곳에 오기 전에는 제물을 바치지 않겠소."

12 그래서 이새가 사람을 보내어 막내 아들을 데려왔다. 그는 눈이 아름답고 외모도 준수한 홍안의 소년이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바로 이 사람이다. 어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라!"

13 사무엘이 기름이 담긴 뿔병을 들고, 그의 형들이 둘러선 가운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그 날부터 계속 다윗을 감동시켰다. 사무엘은 거기에서 떠나, 라마로 돌아갔다.

 

봉독자: 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함께: 하나님 감사합니다.

 

먼저 인사 나누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은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오늘은 사순절 넷째 주일입니다. 특별히 사순절 넷째 주일을 서방교회 전통에서는 라에타레(Laetare)’라고 부릅니다. 라틴어 ‘laetari’(기뻐하다, 즐거워하다)의 명령형으로 기뻐하라는 전례적 표현입니다. 날짜로 볼 때, 사순절 한가운데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묵상 중에 미리 맛보는 위로와 기쁨을 강조하는 날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슬픔 중에 시작되는 기쁨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말씀의 제목을 사막은 샘을 품고 있다로 정했습니다. 소설가 이승우의 산문집 제목이기도 합니다.

 

시작하면서 가벼운 이야기 하나 나누겠습니다. 가장 웃긴 사람은 누구일까요? 저도 처음에 무슨 이야기인가 했는데, 정답을 듣고 바로 수긍했습니다. 차은우입니다. 박보검이 진행하는 음악 프로그램에 나온 출연자들이 남녀 불문하고, 진행하는 박보검을 보고 흐뭇해하는 것을 인상 깊게 본 기억이 있습니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말도 있고, 어쨌든 외모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사무엘상 16: 7

 

그러나 다행인 것은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믿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심이라고 표현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레바브’(לֵבָב)입니다. 보통 영어로는 심장’(heart)으로 번역하는데, 레바브는 단순히 장기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의지, 생각, 지성이 통합된 존재의 알짬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어떤 면에서 여기에 우리의 절망이 있습니다. 우리 존재의 알짬이 하나님께 떳떳하게 보여드릴 만한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 오히려 숨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세상에서는 외모를 보고, 성과와 성취를 보고, 가문을 봅니다. 여기에 좀 더 좋은 사람이라고 치켜세울 때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는 중심은 도덕적 삶 이상의 것입니다. 아주 개인적인 욕망의 성취를 위해서 윤리적인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진짜 마음의 의지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가장 밑바닥까지 들여다본다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 정직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기쁨의 관점에서 나누려고 합니다.

 

버림받은 왕

오늘 본문을 읽기 위해서는 먼저 사울을 살펴봐야 합니다. 사울은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움도 많고, 겸손한 사람이었지만, 왕이 된 이후로 큰 실수를 연달아 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실수는 두세 가지 정도인데, 길갈에서 블레셋군이 쳐들어오자 제사장 없이 직접 제사를 드리는 큰 죄를 범했고,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아각 왕과 좋은 짐승을 전리품으로 챙겨서 사무엘에게 질책을 받게 됩니다.

 

마지막 실수는 여러분이 잘 아는 것처럼 사무엘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을 듣고, 결국 이런 일들이 겹쳐서 하나님께 버림받게 됩니다. 몰라서 잘못한 것이 아니라 일부러 죄를 짓게 된 것인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사울은 백성들을 두려워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민심 혹은 평판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지는지 더 중요하게 생각해서 버림받았습니다.

 

사울의 실패는 사무엘에게 큰 슬픔이었습니다. 슬픔 중에 있는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울이 다시는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못하도록, 내가 이미 그를 버렸는데, 너는 언제까지 사울 때문에 괴로워할 것이냐? 너는 어서 뿔병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길을 떠나,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가거라. 내가 이미 그의 아들 가운데서 왕이 될 사람을 한 명 골라 놓았다.”

사무엘상 16: 1

 

슬픔 중에 기쁨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의 여정이 이렇게 슬픔 속에서 시작합니다.

 

선택받은 목동

사무엘이 이새의 집을 방문하는 것은 비밀 작전을 방불케 합니다. 버림받은 사울이 사무엘의 행보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새로운 인물을 찾으러 간 것을 들키게 되면, 죽음을 면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희생 제사를 드린다는 명목으로 계획을 세웁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새의 집에 들어가 차례대로 아들들을 살펴봅니다.

 

첫째 엘리압이 나타났을 때, 사무엘은 그의 용모에 반합니다.

 

그들이 왔을 때에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속으로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시려는 사람이 정말 주님 앞에 나와 섰구나하고 생각하였다.

사무엘상 16: 6

 

이를 테면, 차은우와 박보검을 만난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셨다.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사무엘상 16: 7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은 그 후로 남은 여섯 아들을 모두 살펴보았지만, 하나님은 선택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일곱 아들을 보았지만, 모두 새로운 왕이 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에게 모든 아들을 본 것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이새는 막내가 있는데, 그 아이는 양을 지키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무엘이 그를 데려오라고 말합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찾는 새로운 왕이 사무엘 앞에 나타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 다윗입니다. 뒷이야기를 아는 우리에게 가슴이 간지러운 감격스러운 장면입니다.

 

그는 눈이 아름답고 외모도 준수한 홍안의 소년이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바로 이 사람이다. 어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라!” 사무엘이 기름이 담긴 뿔병을 들고, 그의 형들이 둘러선 가운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그 날부터 계속 다윗을 감동시켰다. 사무엘은 거기에서 떠나, 라마로 돌아갔다.

사무엘상 16: 12-13

 

그의 용모도 매력적이었지만, 우리가 계속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그의 용모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더욱 감격스러운 점은 다윗의 아버지가 이새이고, 이새의 아버지는 오벳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벳의 어머니는 누구일까요? 바로 룻입니다. 모압 여인 룻이 보아스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실로암

병행 본문인 요한복음 9장의 실로암 이야기를 간단히 살펴보면서 결론을 맺겠습니다.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고 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 전체가 이 이야기인데, 여기에는 중요한 신학적인 질문들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제자들이 그 사람을 보고,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세상은 인과관계 속에서 세상 이치를 파악하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라고 앞으로 이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하실 일이 중요하다고 선을 긋습니다. 이후에 보게 된 이가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은 날이 안식일이므로 시끄러워집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인 사람이 보게 되었다는 사실보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을 더 중요한 문제로 봅니다.

 

9장 마지막에 바리새파 사람과 논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말하였다.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요한복음 9: 41

 

우리도 이 지점에서 왜 바리새파 사람들은 기적보다 안식을 준수에 집착하고, 예수님과 왜 각을 세웠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말하면 그들은 외모를 보는 사람이고, 예수님은 중심을 보는 분입니다.

 

십자가의 직면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제가 요새 읽는 책에서 마음에 와닿은 부분을 나눕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핑계 삼아 지금껏 애써온 모든 일이 다 덧없다고 자기 자신에게 속삭이며 주저앉습니다. 하지만 이 존재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단순히 마음이 약해서 생기는 게 아닙니다. 이는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힘, 우리 의식 안에서 우리를 존재로, 인격으로, 마침내 당신에게로 부르시는 하느님을 향해 귀를 막고 저항하는 것입니다.”

세바스찬 무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낯선 이가 아니다

 

무어는 우리가 유난히 선하고 용감한 사람을 만나면그를 반기지 않고 오히려 불편해한다고 밝히면서 악은 우리에게 더 깊이 참된 인간으로 살라고 요구하는 그 근거 자체를 제거해 버림으로써 자신의 게으름을 정당화하려 몸부림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죄에 사로잡힌 인간의 자아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회개는 거짓된 자아를 버리고 참된 인간으로 돌이켜야 한다는 것이고, 바로 이 지점에 개인적인 노력이나 의지가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직면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남 탓하고, 자기 연민에 빠지고, 저 사람은 이래서 이래, 저래서 저래 하면서 합리화 하는 모든 것이 다 거짓된 자아의 모습입니다.

 

제대로 살지 않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분투하고 있는지는 인정받으려 합니다. 자신은 자신 말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거나 자신도 사랑하는 법을 모르면서 마치 타인을 사랑하는 척하거나 다른 사람에게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으려고만 합니다. 그리고 제대로 사는 사람들을 외면하거나 심지어 비아냥거리기도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에서 인간을 죄인이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직면해야 합니다. 흔히들 알코올 의존증이 심한 사람이 괴로워서 마시고, 괴로운데 술로 푸는 자신이 미워서 마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남을 부정하고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사실은 거짓된 자아의 자기혐오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지 않아야 하는 참된 인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이라는 사실과 마주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직면하는 어떤 일이 생깁니까? , 놀랍게도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은 자라는 사실을 보게 정직하게 인식하는 순간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거짓된 자아가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이것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진실입니다.

 

죄인인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때 깨끗해진다는 것, 존재하지 않으려 한 삶이 부끄러워질 때 존재하는 삶이 열린다는 것, 실패의 순간이 은혜의 순간으로 뒤집힌다는 것,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것, 보지 못한다는 것을 고백할 때 보게 된다는 것, 사울의 실패 속에서 다윗이 성공이 진행된다는 것, 슬픔 속에 기쁨이 있다는 것, 사막은 샘을 품고 있다는 것,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서는 외모가 중요합니다. 이걸 너무 모르는 것도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나 외모에 집착하고, 중심을 가꾸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죄가 된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진실하게 참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참되게 살아가는 기쁨으로 충만하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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