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2026(A)사순절 다섯째 주일 노아교회 설교 본문

실패하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에스겔 37: 1-14입니다.
에스겔 37: 1-14
1 주님께서 권능으로 나를 사로잡으셨다. 주님의 영이 나를 데리고 나가서, 골짜기의 한가운데 나를 내려 놓으셨다. 그런데 그 곳에는 뼈들이 가득히 있었다.
2 그가 나를 데리고 그 뼈들이 널려 있는 사방으로 다니게 하셨다. 그 골짜기의 바닥에 뼈가 대단히 많았다. 보니, 그것들은 아주 말라 있었다.
3 그가 내게 물으셨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내가 대답하였다. "주 하나님,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4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뼈들에게 대언하여라. 너는 그것들에게 전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들어라.
5 나 주 하나님이 이 뼈들에게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6 내가 너희에게 힘줄이 뻗치게 하고, 또 너희에게 살을 입히고, 또 너희를 살갗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7 그래서 나는 명을 받은 대로 대언하였다. 내가 대언을 할 때에 무슨 소리가 났다. 보니, 그것은 뼈들이 서로 이어지는 요란한 소리였다.
8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그 뼈들 위에 힘줄이 뻗치고, 살이 오르고, 살 위로 살갗이 덮였다. 그러나 그들 속에 생기가 없었다.
9 그 때에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생기에게 대언하여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렇게 일러라. '나 주 하나님이 너에게 말한다. 너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이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10 그래서 내가 명을 받은 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 속으로 들어갔고, 그래서 그들이 곧 살아나 제 발로 일어나서 서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다.
11 그 때에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이 뼈들이 바로 이스라엘 온 족속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 한다.
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 백성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고, 너희를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겠다.
13 내 백성아, 내가 너희의 무덤을 열고 그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낼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14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서 너희가 살 수 있게 하고, 너희를 너희의 땅에 데려다가 놓겠으니,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나 주가 말하고 그대로 이룬 줄을 알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봉독자: 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함께: 하나님 감사합니다.
먼저 인사 나누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은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오늘은 사순절 다섯째 주일입니다. 에스겔 본문을 통해서 말씀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먼저 간단히 에스겔과 활동의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에스겔은 주전 597년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예루살렘 공격 때 왕과 귀족, 기술자 등과 함께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는 바벨론에서 예언을 했습니다. 특히 환상을 통해서 나라 잃은 절망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보여주는 예언을 했습니다.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간단한 이야기를 먼저 나누겠습니다. 군대에서 고참이 됐을 때, 장기가 유행이라 후임들과 많이 두었습니다. 저도 승부욕이 있는 편인데, 바로 아래 후임이 저보다 장기를 조금 잘 두었습니다. 근데 이 친구가 이길 때 너무 크게 기뻐합니다. 너무 얄미웠습니다. 근데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도 이기고 너무 좋아하는데, 얼마나 꼴보기가 싫던지 잘못하면 한 대 쳤을 겁니다. 근데 제가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누구야, 너 장기 잘 둔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은 비언어적인 메시지로 나 열 많이 받았다는 정보를 엄청나게 뿜어내며 한 말이었는데, 그 광경을 지켜본 소대장님이 “정훈이 대단하다. 승복하는 게 쉽지 않은데.” 이 말을 듣고 약간 뻘쭘하기도 했습니다. 속마음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날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이기는 게 다가 아닙니다.
펜싱에 ‘투셰(Touché)’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경기 중 상대방의 칼끝이 자신을 찔렀을 때, 공격을 당한 선수가 외치는 말입니다. 뜻은 “찔렸다” 혹은 “닿았다”라고 합니다. 공격 성공에 대한 세레모니가 아니라 당한 자가 승복하는 행위입니다. 펜싱이라는 스포츠가 가진 독특한 스포츠맨십이 느껴집니다. 오늘은 실패에 대해서 나누겠습니다.
마른 뼈와
에스겔은 포로지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 소식은 에스겔뿐만 아니라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막연한 소망, 곧 ‘언젠가 돌아가겠지’ 하는 희망과 믿음까지 산산이 부숴버렸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의 입장에서는 제사장으로서 근원적인 정체성이 사망 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끌려간 바벨론에서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약속하시고, 에스겔은 예언자로 일으켜 세우십니다.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현실 인식입니다. 11절에 잘 드러납니다.
“사람아, 이 뼈들이 바로 이스라엘 온 족속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 한다.”
에스겔 37: 11
한 번 더 상기하면 예루살렘의 함락이나 성전 파괴는 단순히 주권을 잃은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패배’로 인식되었습니다. 민족 신과 지역 신의 개념을 가진 고대 사고방식에서 바벨론에 패배한 것은 바벨론 신 마르둑의 승리를 뜻합니다. 이스라엘은 완전한 패배 의식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우리의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고 한탄했습니다.
오늘 병행 본문인 요한복음 11장은 죽은 나사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소생시키시는 감격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오늘 주목해서 볼 부분은 이것입니다. 곳곳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1: 32
마리아가 예수님 발 아래 엎드려 한 말입니다.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하실 수 없었단 말이오?”
요한복음 11: 37
눈물 흘리는 예수님을 보고 있는 유대 사람들 중에 하나가 한 말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패배하고, 포로로 잡혀가게 하셨는가? 왜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게 하셨는가? 왜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지 않게 하실 수 없었는가? 왜 일이 이렇게 되고 난 후에 일하시는가? 이것이 우리의 질문입니다.
실패를 겪어야 하는가
여기에는 우리가 직면해야 할 생의 중요한 문제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능력 있고, 나를 사랑하는 분이라면 왜 내가 실패하도록 내버려두시는가? 왜 어떤 일들은 일어나고야 마는가? 왜 그토록 사랑하는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 가기 전에 막지 않으셨는가? 왜 그토록 사랑한 마르다와 나사로와 마리아가 죽음을 겪어야만 했는가? 왜 죽은 뒤에 소생시키는가?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실패하지 않도록 막으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실패하도록 내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패합니다. 우리의 뼈는 마르고,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날 정도가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철저하게 실패하기를 원하시는 지도 모릅니다.
둘째로 우리의 실패가 끝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패 후에 새로운 일을 하십니다. 마른 뼈의 골짜기에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다시 살아나게 하십니다. 죽었던 사람이 수의를 입고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오게 하십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주의 말씀은 영원합니다(이사야 40: 8).
우리는 실패를 원치 않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되도록 실패하지 않도록 마음을 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승리지상주의나 성공주의가 아닙니다. 하는 일마다 잘되고, 아무 실수도 하지 않고, 모든 일이 순탄하게 되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맞습니다. 안전한 일상을 경험하지 못하고, 늘 불안 속에 사는 것을 복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정직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실패합니다. 성공만 하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런 동화 같은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비현실적이고, 가벼운 것으로 만들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패를 새롭게 이해하고, 실패를 대하는 자세를 배우고, 연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인에게 가장 좋은 상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참된 인간을 못 견디고 죽이기까지 하는 인간의 죄가 명명백백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지난 주일 함께 나눈 것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 성난 군중이나 빌라도나 로마 병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직면하기를 요청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완전히 실패했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실패했습니까? 우리는 참된 인간을 거부하고 비존재의 유혹에 자꾸 빠집니다. 허무 속에 안주하여 평안을 유지하고, 참되게 사는 것은 유별난 삶이라고 외면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런 자신을 혐오합니다. 그리고 그 자기 혐오 때문에 자꾸만 희생양을 찾습니다. 참되게 살지 못한 자신에 대한 혐오를 상대에 대한 비난과 폭력으로 풀어냅니다. 적당히 사는 것, 자신은 존재하지 않으면서 참되게 살고 존재하려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실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실패하게 내버려두시고, 우리의 실패는 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끝에 도달해야만 우리는 새롭게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패해야 합니다. 적당히 아니라 완전히 실패해야 합니다. 어중간하게 실패해서는 이 악순환의 고리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실패와 하나님의 성공이 연결되는 역사의 전환점입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시작되는 것
윤리적 성취가 있는 인간은 마땅히 박수를 받아야 하지만, 인간의 목적은 윤리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너무 무모한 사람을 보는 것은 답답한 일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더 답답합니다. 말썽도 부리고, 실망도 하고, 실수하고, 다치기도 하는 것이 성장하는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웬만하면 일을 벌이지 않고, 모든 일에 안전을 추구하고, 관성으로만 사는 것은 인간다운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겪는 안타까운 점 하나가 착해지려는 것입니다. 생생한 인간이 되기보다 착한 인간이 되길 원합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우선은 착하다는 평가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체적으로 살지 못합니다. 그리고 현실을 부정하게 됩니다. 인간은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조심해도 죄를 짓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는 알고 짓는 죄보다 모르고 짓는 죄가 더 크고, 치명적입니다. ‘어, 내가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구나. 내가 큰 죄를 지었구나. 죄인이구나. 내가 뭘 몰랐구나’ 하고 깨달을 때, 그때 십자가를 직면하게 됩니다. 안전의 추구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너무 절대화되면 자신의 안전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킵니다.
생생히 실패하고, 실패의 끝까지 가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돼서야 찾아가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절망적인 실패의 순간에 시작되는 용서와 부활의 힘찬 출발이 있다는 사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못되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죄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재앙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지 마시고, 실패하는 자신을 혐오하지 마십시오.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위해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알게 하십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피할 수 없게 하십니다. 내가 파산했다는 사실에서 도망칠 수 없는 때가 도래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가 은혜가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마른 뼈 골짜기와 같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마르다와 마리아와 죽은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이 실패하지 않고, 윤리적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실패하는 순간이 정말 사랑의 능력이 필요한 순간임을 알고 계십니다. 마른 뼈에 생기를 불어넣어 군대를 일으키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수의를 동여맨 죽은 인간을 풀어놓아 걷게 하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믿고, 힘차게 사십시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참되어서, 실패하고, 다시 시작하는 은혜의 삶이 되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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