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2026(A)고난 주일 노아교회 설교 본문

생명처럼 흐르는 영혼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이사야 50: 4-9a입니다.
이사야 50: 4-9a
4 주 하나님께서 나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쳐 주신다. 내 귀를 깨우치시어 학자처럼 알아듣게 하신다.
5 주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셨으므로, 나는 주님께 거역하지도 않았고,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6 나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내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다. 내게 침을 뱉고 나를 모욕하여도 내가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그들이 나를 모욕하여도 마음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냈다.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겠다는 것을 내가 아는 까닭은,
8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나와 다투겠는가! 함께 법정에 나서 보자. 나를 고소할 자가 누구냐? 나를 고발할 자가 있으면 하게 하여라.
9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것이니, 그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 하겠느냐?
봉독자: 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함께: 하나님 감사합니다.
먼저 인사 나누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은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오늘은 고난 주일입니다. 사순절 마지막 은혜를 이사야 본문을 통해 나누겠습니다.
사랑만으로 충분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은 외로워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들어 보셨습니까? 못 들어봤을 겁니다. 제가 만든 말이니까요. 왜 사랑하면 외로워질까요? 우리가 누구를, 무언가를 사랑하게 되면, 다른 문은 닫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회를 사랑하게 되면서 소중한 우정을 등지기도 했고, 비난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열린 문 하나만 남겨두고 나머지 문이 닫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문들이 닫힐 때마다 외로움을 느낍니다.
여기에 우리를 더 무겁게 하는 한 가지 사실은 우리가 사랑한 그 대상을 향한 열린 문조차 언젠가는 닫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새 식어버리기도 하고, 의심이 되기도 하고, 싫증이 나기도 하며, 떠나거나 원치 않지만 떠나야만 하는 때도 있고 심지어 서로 미워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간에게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영원하지 않은 인간은 언젠가 멈추게 됩니다. 죽음이죠. 그러나 역사는 흐릅니다. 마치 음악이 멈추지 않고 흐르는 것처럼, 재생한 플레이리스트가 끊기지 않는 것처럼 역사는 멈추지 않고 흐릅니다.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지만, 인간의 유한성을 넘어서는 것들이 있습니다.
언젠가 역사에도 죽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역사의 죽음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거기서 또 다른 역사가 시작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신화 시대에 지하신이 물러간 자리에 하늘신이 들어선다. 왕조 시대에 왕조는 조각상으로 왕들의 치적을 나열하여 그 무적 불패성을 자랑한다. 이 말 끝에 적은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모든 문명이 망한다는, 그렇게 역사는 매일매일 새로 시작한다는 아주 오래된 증거에 다름 아니다.”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황현산 선생이 김정환 선생의 『음악의 세계사』를 소재로 쓴 글 중의 한 문장입니다. 이 문장 뒤에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지금 손꼽아 6백 일 5백 일을 세는 사람들에게 이 또한 지나가리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이 음악처럼 흐르는 사람들에게는 현실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103)
‘정신이 음악처럼 흐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모든 역사가 망하고, 또 매일매일 새로 시작한다는 사실에 눈뜨는 것이고, 또 영원하지 않은 우리의 일시적인 사랑이라도 그 사랑만으로 충분한 삶을 사는 것, 그 사람들의 빛나는 정신이 역사에 언제나 있다는 진실, 그리고 그 진실을 믿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스도교식으로 말하면, 부활의 하나님이 언제나 지금 여기에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피해자가 아닌 예수님
오늘 이사야 본문은 ‘고난받는 종’의 세 번째 노래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이 본문은 예수님의 수난을 떠올리게 하고, 특히 5-6절은 예수님에 대한 구체적인 암시로 받아들여집니다.
주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셨으므로, 나는 주님께 거역하지도 않았고,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나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내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다. 내게 침을 뱉고 나를 모욕하여도 내가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이사야 50: 5-6
본문을 읽으면 빌라도의 법정에서 수난받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등을 맡겼다’, ‘뺨을 맡겼다’,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같은 문장에서 예수님의 어떤 단단함이 상상됩니다. 7-9절도 마저 살펴보겠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그들이 나를 모욕하여도 마음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냈다.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겠다는 것을 내가 아는 까닭은,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나와 다투겠는가! 함께 법정에 나서 보자. 나를 고소할 자가 누구냐? 나를 고발할 자가 있으면 하게 하여라.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것이니, 그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 하겠느냐?
이사야 50: 7-9
7절은 개역개정 번역이 더 와닿는데,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다는 표현이 의미심장합니다. 이것은 감정이 메마른 상태가 아니라 수치와 모욕에도 흔들리지 않는 예수님의 견고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셔서 인간적인 생명이 끝나는 자리를 묵묵히 받아들이셨습니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마태복음 26: 39
전날 밤에도 몹시 괴로워하셨고,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끝끝내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고, 돌처럼 단단하게 되어 참을 수 없는 고통과 모욕을 견뎌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가해자인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잘못을 인정하고, 기꺼이 감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피해자인가요? 언뜻 보기에 ‘희생양’이 되셨으므로 피해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피해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싯돌 같은 얼굴이 되어 피해자의 캐릭터를 빗나갑니다. 당하는 것이 아니라 감내하는 것입니다.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입니다. 바로 이 점이 십자가가 어떤 종류의 고통이며, 어떤 방향의 삶의 태도인지 이해하는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는 주체적인 수동성입니다.
피해자의 딜레마
하는 일 때문에 피해자, 가해자라는 말을 달고 살고, 실제로도 많이 만났습니다. 학교 폭력에서부터 폭행, 층간 소음, 주차 문제, 가정 폭력, 스토킹 등 실제로 여러 당사자를 만난 경험이 있습니다.
피해자는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 재산, 명예 따위에 침해 또는 위협을 받은 사람”입니다. 가해자는 “해를 끼친 사람”입니다. 받은 사람이 있으면, 끼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많은 경우 준 사람은 없고 받은 사람만 있습니다. 서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상처받았다” “위협을 느꼈다”고 서로 주장합니다. 누구 말이 맞느냐 고민하다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왜 서로 피해자가 되려고 할까? 가해자가 되는 것은 도덕적으로 나쁜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도덕적으로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해자가 되어야 상대방에게 떳떳하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피해자가 되어야 용서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용서를 구해야 하는 처지가 아니라 할지 말지 선택할 수 있는 처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피해자가 가진 유일한 힘인 ‘도덕적 우월성’이 결국 딜레마를 만들어냅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영화 ‘밀양’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이라면 더 피부에 와닿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신애는 아들을 유괴하고 살해한 가해자를 만나러 갑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었기 때문에 용서하러 찾아간 것이죠.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가해자가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피해자인데, 누가 용서한단 말인가?
신애는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이후 신을 향해 적대적으로 변합니다. 이 이야기를 전할 때마다 용서는 피해자에게 구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피해자가 가진 유일한 힘, 도덕적 우월성이 결국 피해자를 무너뜨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피해자로 십자가 수난을 당하셨다면, 십자가에서 ‘내가’ 용서한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23: 34
용서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주님만을 경외합니다.
시편 130: 4
‘하나님만이 용서하신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용서의 어려움을 표현한 말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다른 인간의 처벌권자가 되는 것의 불가능성을 표현한 말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피해자가 되더라도 도덕적 우월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피해자 안에도 악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덕적 우월성을 획득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혼란에 빠지고 파괴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피해자의 딜레마입니다.
피해자로 살지 마십시오
결론을 나누기 전에 노파심에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이것은 여러분이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피해자를 위한 설교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위로와 공감이 필요합니다. 피해자로서의 인정이 필요합니다. 오늘 설교는 노아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한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피해자로 살지 마십시오. 제가 여러분에게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은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이라고 말할 때, 잘 분별하셔야 합니다. 이것을 상투적으로 이해하면 그리스도교의 오래된 클리셰(cliché)일 뿐입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라는 식상한 표현을 반복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죄책감을 부추기고, 오히려 우리가 직면해야 할 문제를 흐리게 만드는 배반적 메시지를 전하고 싶지 않습니다.
역사가 흐른다는 사실과 피해자가 되어 도덕적 우월성을 획득하면 무엇이 문제인지 고난 주일에 이것을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서두에 역사는 흐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도덕적 우월성을 가지면 흐르지 않게 됩니다. 흐름이 멈춥니다.
사랑할 때 닫히는 문은 집중과 몰입의 결과이지만, 피해자가 될 때 닫히는 문은 자기 함몰과 고립의 결과입니다. 나는 피해자일 뿐이야. 바뀌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기 때문에 나는 할 게 없다고 생각하면서 성찰의 대상에서 제외합니다. 살기 위한 선택이 죽는 길이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죽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공유한 영상에서 G. K. 체스터턴이 한 말이 같은 맥락입니다. 기독교가 2천 년 동안 살아남은 이유는 다른 종교보다 탁월한 무엇 때문이 아니라 죽고 살고를 반복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교에는 무덤에서 나오는 길을 아는 하나님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죄책감을 부추기거나 여러분이 상대방의 문제 행동으로 겪는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계속해서 죽고 사는 이 그리스도교 생명의 음악을 들려주고 싶어서입니다. 피해자가 되는 순간 막혀버린 여러분 영혼의 물꼬가 다시 트이게 하고 싶어서입니다.
생명은 매일매일 흐릅니다. 우리가 그토록 피하고 싶은 죽음은 그리스도인에게 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 두려운 것이지만, 하나님은 무덤에서 나오는 길을 아십니다. ‘음악처럼 흐르는 정신’, 곧 생명처럼 흐르는 영혼이 되는 법을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남은 사순절,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다짐하기 바랍니다. “가해자도 되지 않고, 피해자도 되지 않겠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예수님의 주체적인 수동성을 닮아가고, 생명의 영혼이 되어 매일매일 흘러서 강으로 바다로 가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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