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2026(A)부활절 넷째 주일 노아교회 설교 본문

공동체적 집중의 시간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사도행전 2: 42-47입니다.
사도행전 2: 42-47
42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43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44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45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46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봉독자: 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함께: 하나님 감사합니다.
먼저 인사 나누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은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오늘은 부활절 넷째 주일입니다. 지난주에 이어 사도행전 본문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순절 기적 이후에 예루살렘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최초의 교회가 됩니다. 흔히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데, 맞는 말입니다. 세례받은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은 이들이 어떤 공동체였는지 서술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혹은 원시 교회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읽으면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의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됩니다. 일단은 말씀에서 드러난 네 가지 중요한 기준을 나누고 시작하겠습니다.
사도의 가르침(42절)
초대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과 동고동락한 사도들이 증인의 역할을 했고, 이것이 교회 공동체의 중심을 잡습니다.
대안적 경제 공동체(44-45절)
초대 교회 공동체는 소유를 공유했습니다. 이는 억지로 한 일이 아니라 아무도 궁핍하지 않도록 상호 돌봄을 실천했습니다.
성찬(46절)
떡을 떼고, 빵을 뗐다는 것은 성찬을 실천했다는 의미입니다. 원래 성찬은 끼니를 해결하는, 배부르게 먹는 식사의 형태입니다.
기도(42, 43, 46절)
마지막으로 기도에 힘썼습니다. 43절에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라고 한 것은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서 외경심을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46절에 성전에 열심히 모였다고 하는데, 이것이 초대 교회의 예배 생활과 연결됩니다. 성전은 기도하러 날마다 모이는 장소인 동시에 선포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초대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시작하신 일을 이어갑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성찬은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개인의 집에서 행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성찬에서 배제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성찬은 그리스도인의 배타적인 실천입니다.
정리하면, 초대 교회 공동체는 신앙생활을 포함한 전체 삶의 방식을 통해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했고, 이는 선교적인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이들의 삶의 방식에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호감을 느꼈고, 폭발적인 성장과 아울러 지속적인 성장이 있었다는 것이 사도행전의 증언입니다.
삶의 변화
삶을 조금만 바꾸려고 해도 저항이 발생합니다. 변화를 시도한 사람은 알게 됩니다. 기존 삶의 관성이 매우 강력하다는 것을! 1도만 각도를 조정하려고 해도 삶은 곧바로 무거워지고 나를 적대시합니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거나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삶의 변화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 공동체는 삶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이전에 없던 공동체를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초대 교회의 내용보다도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부활의 하나님은 삶을 완전히 새롭게 창조하는 능력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꼭 바꿔야 하나? 좋은 모습을 유지하면 되지 않나? 말은 그럴듯하나 이것은 삶의 위력을 너무 얕본 순진한 말입니다. 현상 유지는 후퇴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 눈에 모든 물체가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여도 지구는 자전하고 공전합니다. 삶은 시시각각 변하고 세상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요청합니다. 조심스럽지만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말도 순진한 말로 들립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것을 익혀서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말입니다. 초대 교회에 새로운 공동체가 출발하게 된 그 창조적 역동성을 지금 우리 삶에서 어떻게 상상하고 구현할까? 이것이 우리의 과제가 되어야 하지 과거의 형식을 그대로 복제하려는 것은 과거에서 배울 것을 오히려 배우지 못하게 하는 뒷걸음질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고, 실천에 집중할 수 있던 초대 교회 공동체의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바로 이것이 우리의 질문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의 능력이고, 성령의 역사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것이 답인데, 구체적으로 교회 공동체 창조에 어떤 식으로 작동했는지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변화에 저항하는 옛 삶의 저항과 관성을 어떤 힘으로 돌파했는지 함께 이해해 보려고 합니다.
상대적 가치
가치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고, 교회에서 진리를 다루다 보니 절대적 가치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지역마다 시대마다 제각각의 문화가 있고,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에 따른 가치가 저마다 다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아프리카 어디 갈 것까지도 없습니다.
여러분 요새 선물하기 어렵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이걸 좋아할까? 싫어하면 어떡하지? 고민이 되다 보니 돈을 주거나 상품권을 줄 때가 많습니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할까요? 공통의 경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호의를 베풀기도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타인의 호의에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오늘 병행 본문인 요한복음 10장은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에 관한 본문입니다.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릅니다. 예수님은 친히 양의 문이 되십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배타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닫힌 사람입니다.
이는 우리가 진리를 독점했다거나 특별한 존재라는 말이 아닙니다. 목자가 양의 이름을 부를 때,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르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에 집중하는 존재임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관계를 닫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배타성이 상대적 가치보다 우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맺은 사랑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에 방임하지 않습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지 않습니다. 어긋나면 징계해서라도 돌이키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오래 참지 않습니다. 쉽게 포기하고, 변합니다.
결혼식을 왜 할까요? 역설적으로 우리의 사랑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도로 돕지 않으면 우리의 사랑은 금방 식어버리고 맙니다. 세례는 왜 받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왜 주일을 지키라고 할까요? 배타적 구속력이 사라지면 인간은 변합니다. 인간은 변하기 어려우면서 동시에 쉽게 변하는 역설적인 존재입니다.
공동체적 집중의 시간
그래서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는 새로운 공동체적 삶을 창조하고 거기에 전념했습니다. 여러 겹으로 엮어서 세상 흐름에 쉽게 떠내려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가치는 상대적이지만, 공통의 경험과 통일된 삶의 방식을 찾고, 집중해서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붙들려야 합니다.
초대 교회에서 배운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교인들이 저마다 삶의 경험이 다르고, 저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다릅니다. 이 다름, 곧 다양성이 갈등을 유발하고 변심을 유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공통의 존재 양식을 고민해야 합니다. 고유한 정체성과 통일된 실천을 마련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에는 예수님을 직접 겪은 사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중심을 잡고, 예수님의 메시지를 가르쳤습니다. 우리에게 사도는 없지만, 오랜 교회 전통과 역사를 통해 건강한 신앙의 중심이 되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는 같은 지역에 살면서 대안적 경제 공동체를 이뤘습니다. 그 안에서 배고픈 사람이 없게 서로 돌봤습니다. 우리는 한 지역 살지 않습니다. 한계로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우리도 서로의 삶을 돌볼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의 성찬은 끼니의 개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빵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농담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이 교제를 통해 충족되어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우리는 서로를 먹여야 합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는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기도의 양이 아니라 사실 이 전념 혹은 집중의 시간 자체가 기적입니다. 인생의 변화는 집중의 시간 없이 생기지 않습니다. 흘러가는 시간을 질적으로 바꾸어 낼 공동체적 집중이 필요합니다. 표현이 좀 그렇지만, 공통의 적이 있든지 공통의 과제가 있든지 해야 집중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노아교회 여러분, 저는 요새 우리 교회의 미래에 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공동체적 집중의 시간이 창조되는 역동적 생명력을 경험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변화가 필요할 것입니다. 새로운 프로그램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을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적 존재 양식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침몰할 사람이 아닙니다. 부정적인 이유로 변화를 강요받으면 안 됩니다. 현상 유지가 목표인 교회가 돼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변화는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가 새로운 공동체로 창조될 수 있었던 것은 배타적인 사랑의 원천이 공동체 내부에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교회의 미래와 변화를 위해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공동체적 집중의 시간을 상상해야 합니다. 새로운 다짐이 필요합니다. 부활의 하나님께서, 성령의 충만한 임재가 우리를 더 나은 공동체로, 더 나은 존재로 변화하게 할 것입니다. 믿음의 눈을 크게 뜨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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