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2026(A)부활절 다섯째 주일 노아교회 설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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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A)부활절 다섯째 주일 노아교회 설교

한, 정훈 2026. 5. 2. 23:08

바라봐도 될까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사도행전 7: 55-60입니다.

 

사도행전 7: 55-60

55 그런데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였다.

56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하고 말하였다.

57 사람들은 귀를 막고, 큰 소리를 지르고서,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58 그를 성 바깥으로 끌어내서 돌로 쳤다. 증인들은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

59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스데반은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하고 부르짖었다.

60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하고 외쳤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다.

 

 

봉독자: 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함께: 하나님 감사합니다.

 

먼저 인사 나누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은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오늘은 부활절 다섯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기도 합니다. 어린이들과 함께 예배드리지는 않지만, 어린이 주일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어린이 주일에 읽기에 무거운 본문인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 새로운 은혜를 얻게 되길 기도합니다.

 

하늘을 바라보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에는 초현실적인 신뢰의 모범을 보여주는 스데반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은 예루살렘 교회의 구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된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민간에 기사와 표적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압도적인 언변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은 그를 고소해 공회에 끌고 갔습니다. 미리 매수한 사람들을 통해 신성 모독에 대해 거짓 증언을 하게 합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 역사를 관통하는 긴 연설을 통해 자신의 변호를 합니다. 내용 중에 하나님께서 보낸 의인을 배척한 것을 지적하자 격분한 유대인들은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음에 찔려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전혀 다른 끔찍한 선택을 합니다. 이를 갈고 있는 이들 앞에서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자제력을 잃은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향해 집단 투석 방식으로 그를 살해합니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은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깁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친 후에 숨을 거둡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시지 않고) 서 계신 예수님을 본 스데반은 주님과 닮은 모습으로 잠들었습니다.

 

자아를 바라보다

스데반은 온전히 주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는 신뢰를 통해 품위를 잃지 않았고, 예수님과 같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어느 누구도 스데반과 같은 결과를 맞이해서는 안 됩니다. 하늘의 관점은 또 다르겠지만, 인간적으로는 너무 안타까운 죽음입니다. 자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스데반은 어떻게 이런 초현실적인 신뢰를 보여줄 수 있었을까요?

 

최근에 신뢰에 관해서 자주 생각합니다. 특히 관계나 미래의 영역 안의 신뢰를 자주 생각합니다. 사람을 신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미래를 신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믿는다는 표현을 자주 합니다. 믿음을 좀 다르게 말한다면 신뢰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신뢰를 붙잡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우리의 현실이 불안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데반의 모습을 읽은 후라 불안해하는 것은 신뢰와 반대되는 말처럼 들릴 수 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이 잠잠해지면 올곧게 하늘을 향하는 것처럼 우리의 근원적인 지향이 흔들리지 않으면 됩니다.

 

좀 더 구체적인 문제로 들어가 볼까요? 오늘 어린이 주일이라고 했는데, 자녀와 자녀의 미래를 신뢰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역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상대적으로 신뢰하기가 어렵고, 자녀에 대한 고민이 많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계속해서 나누고 있는 타인에 대한 태도가 자신에 대한 태도와 연결된다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더 근원적으로는 자녀와 자녀의 미래와 관련된 모든 생각은 부모의 자기 인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자녀가 되었든지 남이 되었든지 타인에 대한 생각은 자신에 대한 생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니 어떤 때는 내가 하는 모든 생각이 자아에 대한 이해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세상을 어떻게 보고, 받아들이는지, 또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는지 같은 것들이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와 연관이 깊고, 또 결국에는 이것이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한다는 생각을 꽤 오래전부터 해오고 있습니다. 자기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도 불안하게 만들고, 자기를 신뢰하는 사람은 타인도 신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 그렇다면, 스데반이 어떻게 주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입니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 주님을 온전히 신뢰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분을 만난 사람인 것입니다. 그는 신뢰할 만한 대상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신뢰한 것입니다.

 

신뢰할 대상을 바라보다

그가 주님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를 붙잡은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성령 충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은 올려다볼 하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하늘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입니다. 이점이 스데반에게 주어진 은총입니다. 인간적으로 그는 비참하고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광기의 폭력이 날뛰며 죽음으로 몰아가는 시간, 그 순간에도 자신을 짓누르는 삶의 조건이 아니라 올려다볼 하늘에 시선을 고정했습니다. 솔직히 너무 부럽습니다. 그가 맞이한 죽음은 상상하기도 너무 두렵지만, 죽음이 날뛰는 그 순간에도 그는 바라볼 곳, 신뢰할 대상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자녀들이 인생의 무게에 짓눌릴 때 누구를 바라봐야 합니까? 부모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우리 자녀에게 스데반이 바라보고 신뢰할 만한 대상이 되어주고 있을까요? 십여 년간 회복적 정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회복적 정의가 직업으로 밥벌이의 수단이기도 했지만, 사람에 대한 공부였다고 생각합니다. 회복적 정의에 빚을 졌습니다.

 

제 경우에 아이들이 힘들어할 때, 세상보다 더 엄격한 처벌권자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자신과 함께 무너지는 연약한 존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제가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저를 바꾸어 보고 싶었지만, 지난주에 나눈 대로 살아온 삶의 관성이 너무도 강력합니다. 그래서 애통하면서 쓴 글이 있습니다.

 

내가 표현하는 세상은 늘 어두웠다. 바꿔보고 싶다. 애들이 내 삶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쩌면 내 몫이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은근히 좋아요를 바라고 쓴 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글에 달린 댓글 하나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세월호 참사 때 딸을 잃은 어머니입니다. 공부 모임에 이야기 손님으로 초대한 이후로 SNS를 통해서 교제를 이어오고 있었는데, 그분이 제 글에다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네요라고 적은 것을 본 것입니다.

 

정직하게 쓴 글이라 부끄럽지는 않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을 겪은 분에게 혹시라도 누가 되었을까 봐 겁이 났습니다. 제가 이런 글을 쓰게 된 것은 몇 년 전에 이런 글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삶이 당신에게는 무덤과 같은 곳이어도 적어도 아이들에게는 그곳을 목장으로 볼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야누슈 코르착)

 

부모를 바라보다

사랑하는 여러분, 화나도 안 난 척하거나 당황해도 안 그런 척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자녀가 우리를 신뢰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으려면 우리 스스로가 어느 때고 신뢰할 수 있는 대상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어려울 때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 바라보라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신뢰하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에게 신뢰의 대상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신뢰의 대상 안에서 우리를 신뢰해야 합니다. 자녀를 어떻게 공부시킬까, 어떻게 가르칠까 중요한 문제이고, 그래서 자꾸만 이건 잘했나요 이건 어떤가요 누군가에게 묻고 확인받고 싶어 하지만, 그것 자체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증거이고, 신뢰할 대상이 없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것도 가장 어려울 때 바라봐야 합니다. 그럴 때 삶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가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언젠가 부모님도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또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부모님과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아니 부모님과는 다른 사람이지만 부모님을 존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병행 본문인 요한복음 14장 말씀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6)라고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기록된 본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임을 믿고 고백하고, 거기에 삶을 거는 사람입니다. 자주 흔들리더라도 우리의 지향은 올곧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이 고빗사위에 우리를 보고 신뢰에 자신을 맡길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누군가 바라보고 신뢰할 대상이 되길 바라고, 그 힘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를 신뢰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 자신과 주변 동료들과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신뢰할 수 있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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