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가능성 :: 한, 정훈

2026(A)성령강림 주일 노아교회 설교 본문

노아교회/설교

2026(A)성령강림 주일 노아교회 설교

한, 정훈 2026. 5. 23. 21:51

소통하는 존재의 시작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민수기 11: 24-30입니다.

 

민수기 11: 24-30

24 모세가 나가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백성에게 전달하였다. 그는 백성의 장로들 가운데서 일흔 명을 불러모아, 그들을 장막에 둘러세웠다.

25 그 때에 주님께서 구름에 휩싸여 내려오셔서 모세와 더불어 말씀하시고, 모세에게 내린 영을 장로들 일흔 명에게 내리셨다. 그 영이 그들 위에 내려와 머물자, 그들이 예언하였다. 이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들은 다시는 예언하지 않았다.

26 그런데 두 남자가 진 안에 남아 있었다. 하나의 이름은 엘닷이고, 다른 하나의 이름은 메닷이었다. 그들은 명단에 올라 있던 이들이지만, 장막으로 가지 않았다. 그런데 영이 그들 위로 내려와 머물자, 그들도 진에서 예언하였다.

27 한 소년이 모세에게 달려와서, 엘닷과 메닷이 진에서 예언하였다고 알렸다.

28 그러자 젊었을 때부터 모세를 곁에서 모셔온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나서서, 모세에게 말하였다. "어른께서는 이 일을 말리셔야 합니다."

29 그러자 모세가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나를 두고 질투하느냐? 나는 오히려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 모두에게 그의 영을 주셔서, 그들 모두가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30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은 함께 진으로 돌아왔다.

 

봉독자: 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함께: 하나님 감사합니다.

 

먼저 인사 나누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은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주일입니다. 성령강림 주일은 교회의 생일인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오늘을 시작으로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를 기억하게 하고, 자라게 하고, 하나 되게 하시는지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교회가 어떤 공동체인지 함께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런 소망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리더의 탈진과 성령 강림

오늘 본문은 민수기 말씀입니다. 잠시 오늘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모세를 통해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은 두 번째로 원망합니다. 그중 핵심이 되는 것이 고기를 먹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만나를 주셨는데, 이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일련의 사람들에게서 시작된 불평은 나중에 온 종족에게 퍼집니다.

 

하나님도 모세도 이런 상황을 매우 좋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모세도 이제 힘에 부칩니다. 제가 어쩌다가 이 모든 백성을 맡게 되어서 이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느냐고 하나님께 여쭙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진 지도자의 마음이 지하에까지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심지어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합니다.

 

백성의 원망과 모세의 탈진에 대한 응답이 오늘 본문 직전에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함께 리더 그룹이 될 70명을 모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모세가 받은 영을 주겠다고, 성령의 강림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물릴 때까지 한 달 동안 고기를 먹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남자만 60만 명에 이르는 이 인원이 한 달 동안 먹을 고기를 어떻게 구할 수 있겠냐는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나의 손이 짧아지기라도 하였느냐?” 라면서 지켜보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일들이 있은 후에 장로 칠십 인을 모은 후에 일어난 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성령을 받게 됩니다.

 

말씀의 내용은 간단히 이렇습니다. 성령이 70 장로에게도 임하여 그들이 예언을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예언이 일시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도 오늘 자세히 다루지는 못하지만 의미심장한 부분입니다. 어쨌든 명단에 있었지만 장막에 남아 있던 두 사람이 있었는데, 성령이 이들에게도 강림하셔서 그들도 진에서 예언을 합니다.

 

이 소식을 듣게 되자 함께 있던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어른께서는 이 일을 말리셔야 합니다.” 하고 말하자 모세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주제입니다.

 

네가 나를 두고 질투하느냐? 나는 오히려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 모두에게 그의 영을 주셔서, 그들 모두가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민수기 11: 29

 

이후에도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또 길게 보면 이때 생긴 장로 문화가 산헤드린 공의회와 같은 이스라엘의 문화로 자리 잡은 것을 볼 때, 완벽한, 신의 한 수라고 보기는 좀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모세가 얼마나 탈진된 상태였는지 생각한다면, ‘모든 백성이 성령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말이 무겁게 들리기도 합니다.

 

보편성

이어서 생각해 볼 주제는 성령의 보편성입니다. 성령을 통한 능력이 모든 백성에게 임하면 좋겠다는 모세의 말은 기본적으로 그가 얼마나 자신의 리더 역할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는지 더듬어 볼 수 있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여정이 약속한 땅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백성들이 힘들게 했는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물에서 건졌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모세에게 얼마나 쏟아부었는지 모릅니다. 더우면 덥다, 추우면 춥다, 물을 내놔라, 고기가 먹고 싶다 등 광야 생활의 대부분이 끊이지 않는 원망의 목소리로 어수선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세는 성령 강림의 보편성을 추구했습니다.

 

나 하나가 아니라 백성 모두가 내가 들은 것을 듣고, 내가 본 것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성령의 임재와 성령 충만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정보입니다. 물론 약간의 과장법일 수 있으나, 단순히 그의 탈진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광야의 여정이 쉽지 않으므로 구성원 모두가 성숙하게 되는 것을 바랄 수 있다고 수긍하게 됩니다.

 

이상한 표현일 수 있지만, 아이들 키우면서 애들이 빨리 컸으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모든 백성이라는 말이 그렇게 읽힙니다. 현실적으로는 모든 백성이 되는 것은 어렵습니다. 어떤 곳이든지 소수의 사람이 이끌어 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어떤가요? 저는 모세가 민주주의적인 성령의 임재를 소망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자신의 탈진에서 벗어나고 싶고, 앞으로 충분히 예상되는 골치 아픈 문제에서도 해방되고 싶었겠지만, 그보다 백성 한 명 한 명이 모두 자기 스스로 주인 의식을 가지고 이 여정을 걷기를 바랐던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읽으면 교회에서 소위 성령 충만하다는 사람들의 모습이 얼마나 오늘 본문과 어긋나는지 보이게 됩니다. 방언을 받았다, 그럼 그날부터 눈빛이 변하고,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기도로 누가 나았다, 그럼 그날로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치유자 행세를 하기 십상입니다.

 

또 그런 개인뿐만 아니라 더 문제인 것은 능력 있다는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 앞에서 자신의 보잘것없는 속마음을 들킨 사람처럼 의기소침해져서는 그를 더욱 나르시시즘에 빠지게 하는 무분별한 대중의 추종도 문제입니다. 비단 성령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교회의 일상에서나 정치 영역에서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확실히 말합니다. 성령은 어느 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성령을 받기 원하십니다.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이 바라본 마지막 날의 이스라엘 회복은 어린아이부터 젊은이와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세상이었습니다. 민주주의의 이상이 실현된 것처럼 성령의 충만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를 바랍니다.

 

마음에서 손과 발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70 장로들이 예언했다고 할 때, 이것이 미래를 점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마음을 받았다는 것이지 미래를 맞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라삐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예언자를 하나님의 파토스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헤셸은 무정한 하나님이 아니라 아파하시고, 분노하시고, 질투 등 감정을 표현하시는 하나님에 관해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 중에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파토스를 알게 해달라는 것이고, 다시 말하면 예언자가 되게 해달라는 간구, 성령 충만하게 해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공감에 관한 책을 몇 주간 함께 읽었는데,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을 영어로 표현하면 ‘sympathy of the divine pathos’ , ‘하나님의 마음을 인지적으로 공감(sympathy)하고 싶어요가 됩니다. 세상 말로는 공감이 상대방을 알아가는 것이지만, 하나님과 나 사이에 공감이 되면 그것이 성령 충만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 강림, 성령 충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서 그대로 응답받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그럼, 파송됩니다. 세상으로 나가게 됩니다. 교회에서 머무르지 않고, 나가서 손과 발로 일하게 됩니다. 누군가 한 기도의 응답이 되는 존재가 되기 위해, 자기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여정을 떠나게 됩니다.

 

천국행 티켓을 얻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손과 발을 쓰는 사람이 됩니다. 자기 세계에 갇히지 않고, 더 큰 세상을 자기 사역의 바운더리에 포함시키게 됩니다. 그게 성경이 말하는 비전입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사도들이 성령의 임재를 위해 기도에 전심을 다하고 받은 그 성령의 강림으로 무엇을 얻었습니까? 어떤 능력이 주어졌습니까?

 

방언이요? 남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는 능력? 아닙니다. 그것은 부분적인 현상입니다. 방언의 의미는 바벨탑 사건에서 다루듯이 자기 욕심으로 각기 나뉘었던 사람들의 말이 이제 성령으로 인한 새로운 창조로 다시 소통하게 되었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강림을 경험한 사람들이 어떻게 됩니까? 지난주에 읽은 대로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그 기록이 사도행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 충만의 결과는 소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세상 유행어를 말하고, 서로 뭐가 힘든지 알아서, 보면 눈물 나는 그런 소통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어서, 하나님 마음에 공감해서 세상에 나가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죄로, 상처로, 욕심으로 찢기고 나뉜 것을 하나 되게 하는 존재, 곧 소통하게 하는 존재가 되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그 내용이 평화이고, 용서이고, 사랑인 것입니다. 나뉜 것을 하나로 만드는 것, 평화와 용서와 사랑의 일. 이것이 교회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소통하는 분입니다. 하나님 마음의 울림에 공명하여서 하나 되게 하고, 소통하게 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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